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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독자’와 ‘소비자’는 같은 뜻일까 / 명인

등록 2020-09-20 17:15수정 2020-09-21 02:06

명인(命人) ㅣ <회사를 해고하다> 저자

도서정가제 폐지 논란으로 촉발된 ‘동네 책방 살리기’ 운동이 한창인가 보다. 거기엔 나라고 이견이 있을 리 없지만, 덧붙여 나는 좀 다른 생각들이 떠오른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부터 주로 구립도서관을 놀이터 삼아 놀았다. 대가족 안에서 나보다 열살쯤 많은 고모, 삼촌과 같이 산 영향으로 도서관을 알았고, 집에 굴러다니는 책이면 닥치는 대로 보고 자랐던지라 도서관에 굳이 어린이 책이 많지 않아도 좋았다. 중학교 때부터는 주말이면 새벽같이 버스를 타고 시내 도서관에 가서 노는 재미가 들렸다. 읽고 싶었던 책을 빌려 읽는 것도 좋았지만 나는 대기표를 받고 책가방을 줄 세워 공부하러 들어온 사람들 틈에서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서가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게 좋았다. 읽을 책을 작정하고 가는 날도 있었지만 어떤 날은 제목이, 어떤 날은 표지 디자인이 맘에 드는 책을 고르는 것도 좋았다. 내가 고른 책에서 우연히 누군가 꽂아 놓은 서표가 ‘툭’ 하고 떨어지거나 책갈피에서 메모지라도 발견하면 읽던 책을 내려놓고, 그 책을 나보다 먼저 만났던 누군가에 대한 상상에 잠기는 일도 참 좋았다. 나는 벚나무 꽃비 내리는 정독도서관의 봄이 너무 좋았고, 주변에 산책하며 사색에 잠기기 좋은 곳이 천지인 남산도서관도 참 좋았다.

사는 게 바빠지고 스스로 돈을 벌어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한동안 도서관에 가는 재미를 잊었다. 그런데 직장을 때려치우고 적게 벌고 적게 쓰는 것을 목표로 고흥으로 이사를 오고 나니 책값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책 살 돈이 없게 되고서야 나는 다시 도서관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도서관에 가는 습관, 달마다 희망도서를 신청하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일과 관련하여 자주 꺼내서 보게 되는 책이나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은 여전히 사서 읽지만,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이든 이미 읽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든 가리지 않고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하곤 한다. 읽고 싶은 걸 미루었다가 정작 읽을 수 있을 때 사려고 보면 절판된 책들이 너무 많으니 출판사에도 작으나마 도움이 되고 싶고, 좋은 책은 누구라도 원할 때 읽을 수 있도록 고흥의 도서관 서고도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어떤 사람들에게 도서관은 시험공부나 하는 ‘독서실’에 불과할지 모르고, 한국 사회에서 도서관이란 그저 ‘책을 빌리는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지만, 세상엔 놀랍도록 다양하고 재미있는 도서관들이 많다. 유럽 여행 중에 내가 가본 도서관들만 해도 ‘이곳이 정말 도서관이란 말이야?’ 할 정도로 한국의 도서관과 너무 달라서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조금주 지음)이나 <도서관 여행하는 법>(임윤희 지음)을 읽고는 너무 샘이 나서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인상적인 도서관들이 아주 많았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장 부러웠던 건, 이용자가 물어보면 전문 사서가 답변해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도서관이었다. “연은 언제 만들어졌나요?” 같은 사소한 질문부터 “이슬람 국가의 동물 보호와 권리에 대한 논문을 쓰려고 합니다. 자료를 추천해주세요” 같은 전문적인 질문까지 성실하게 응답해주는 전문 사서가 있는 도서관. 그야말로 ‘앎의 세계에 진입하는 모두를 위한 응원과 환대의 시스템’으로서의 도서관 말이다.

나는 ‘동네 책방 살리기 운동’이, ‘공공도서관’에 대한 더 넓은 상상력과 정치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책과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공간만이 아니라 책과 ‘독자’가 만날 수 있는 공간들을 곳곳에 더 많이 열었으면 좋겠다. 책이 ‘상품’을 넘어서는 ‘공공재’란 생각에서 출발해야 ‘동네 책방 살리기 운동’도 시장의 경쟁 원리를 넘어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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