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ㅣ 지식디자인연구소장
민주당의 힘은 막강하다. 행정권력과 지방권력, 여기에 의회권력까지 장악하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21대 국회가 시작된 후 민주당은 ‘임대차 3법’을 통과시켰고, 전국민고용보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엔 ‘공정경제 5법’을 밀어붙일 태세다. 이러한 시도들은 문재인 정부, 민주당이 지금까지 표방해온 정체성에도 부합하고, 시대 흐름에도 맞는 것들이다. 성과를 내면 좋겠다.
그런데 큰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가 세상을 바꿔 놓고 있기도 하지만, 코로나 이전에도 4차 산업혁명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던 터라 지금은 더 담대한 구상과 혁신적 노력이 요구된다. 하나하나 또는 몇 개 정책을 묶어서 내는 좋은 정책들을 넘어 민주당, 더 나아가 진보세력이 세상을 바꾸는 시도를 하고 국민들 눈에도 그것이 확연하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안정적 개혁다수연합이다.
180석을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데 왜 연합을 모색해야 할까? 가진 힘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지에 집중해야지 잘되지도 않을 연합이나 연대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나? 당연한 질문이다. 그런데 혼자 힘으로 다 하려고 하면 잘되지 않는다. 부작용도 크고, 멀리 못 간다. 민주당만의 힘으로 개혁을 관철하려면 제1 야당과의 적대적 전선이 가장 강하고 선명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다. 국회는 늘 싸움판이 되고, 이런 싸움은 거리·골목에서도 상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다수의 국민을 소외시키게 된다. 민주당만의 힘으로 하게 되면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으로 비치게 된다. 이 또한 개혁의 동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이런 개혁은 또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 일방에 의해 밀어붙인 것으로 반대 세력이 다수당이 되면 얼마든지 무력화될 수 있기에 반개혁의 저항이 지속된다.
한국 사회의 개혁은 모두가 공감하는 시대과제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이다. 그간에는 의회에서 개혁파가 소수였기에 역부족이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폭넓은 개혁연합의 기회가 있긴 했지만 지나간 얘기다. 따라서 의회에서 개혁파가 다수를 이루는 것이 중요했고, 지난 총선에서 국민들이 이를 이뤄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 다수를 넘어 ‘사회적’ 다수를 형성해야 한다. 개혁의 성패는 이 사회적 다수의 형성 여부에 달려 있다.
사회적 다수는 여론조사를 통해 개별 정책에 지지하는 응답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수동적·반응적 지지가 아니라 적극적·공세적 참여를 끌어내야 한다. 개혁을 통해 자기 삶의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하게 만들어야 한다. 개혁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실제로 그 정책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현장에서 관철될 때까지 사회적 다수가 주도해야 한다.
사회적 다수를 형성하려면 우선 여권이 더 적극적으로 소통에 나서야 한다. 대통령부터 미디어를 통한 소통도 더 넓혀야 하고, 일상과 시장에서 움직이는 시민·사회단체와 넓고 깊게 소통해야 한다. 보통사람들의 생각에 반응하고 그를 개혁 의제로 제기해야 한다. 일종의 ‘전시 내각’도 필요하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당파·계층을 넘어서는 통합정부를 구성했듯이, 코로나19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 그런 전시 내각을 통해 통합정부를 추진하는 것이다. 실제 어느 정도의 통합성을 확보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전례 없는 통합성을 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각의 시간이라고 한다. 사실 다음 대선이 본격화하기 전까지가 개혁의 골든타임이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개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번 개각은 전시 내각에 준할 정도로 과감한 발탁과 다양한 층위를 포괄해 사회적 다수를 구성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당적이 다른 장관들이 포진하고, 30대 장관처럼 신선한 발탁도 보이고, 노동 출신과 기업 출신의 장관도 등장하는 무지개 내각이면 좋겠다.
“무엇이든 되기 전에는 다 불가능해 보인다.” 27년 감옥 생활을 했지만 집권 뒤 그를 탄압한 세력과 화해를 추구한 넬슨 만델라의 말이다. 불필요해 보이고, 심지어 불가능해 보여도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다. 익숙한 문법에서 벗어나 혁신적 시도를 할 때, 그런 용기를 보일 때 비로소 사회가 좋아진다. 역사의 아픈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