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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명절과 거실 / 노은주·임형남

등록 2020-09-29 17:50수정 2020-09-30 02:36

노은주·임형남 ㅣ 가온건축 공동대표

집은 시대와 생활 방식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다. 넓은 공간에 불을 가운데 두고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원초적인 구성에서, 점차 방들이 생기고 기능별로 부엌, 화장실, 창고 등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집안의 서열이나 위계처럼 공간들도 위계가 뚜렷해졌는데 안방, 건넌방, 사랑채 그리고 집의 중심인 대청은 집의 주요공간이었고, 부엌이나 화장실은 생존에 무척 중요한 요소였지만 천대받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처갓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며 집의 가장 후미진 외부에 있었던 화장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무척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무렵 부엌도 집안으로 들어왔는데 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집안의 중심공간이 되어버렸다. 집안 권력구조의 변화를 공간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여전히 집안의 중심에 있으면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애매한 공간이 되어버린 거실은, 옛집으로 말하자면 대청의 기능을 하는 곳이다. 집안의 온갖 제례와 대소사를 치르는 대청은 집을 지켜주는 성주신을 모시며 집의 주인이 관장하던 공간이었다. 제례나 의식이 많이 줄어들고 결혼이나 회갑, 돌잔치 같은 집안 행사도 주로 외부의 전문화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며, 넓기만 한 거실에서는 커다란 소파와 벽면을 가득 채우는 텔레비전만 멀뚱멀뚱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그런데 명절이 되면 그동안 뒤편으로 물러서 있던 거실이 큰기침을 하며 잠시 예전의 권위를 되찾는다. 대부분 집안의 명절 풍경은 비슷하다. 큰집에 친척들이 모이고 여자들은 부엌에서 분주히 상차림을 준비하고, 남자들은 제기를 가다듬고 음식을 배열하며 지방을 쓴다. 그리고 늘 순서가 헷갈리며 차례를 지내는데, 그런 일들이 대부분 거실에서 이루어진다.

의식이 끝나면 음복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 혹은 졸업과 취업과 결혼에 대한 압박이 간식처럼 상 위로 오고 간다. 젊은층이 가장 싫어하는 시간인데 농담처럼 ‘잔소리 가격표’가 떠돌기도 했다. 그러고는 재탕 삼탕 매년 돌아오는 가족 영화나 스포츠 중계를 보면서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저녁이 될 무렵 모였던 가족들은 흩어지기 시작한다. 더 있으라며 만류하는 측과 서둘러 돌아가 남은 휴일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오가며 명절이 마무리된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고 매년 같은 이야기, 같은 음식이 마치 사건이 무한히 반복되는 영화처럼 흘러간다. 그사이 아이들이 자라고 어른들은 나이가 더 들고 명절의 열기도 의미도 오래된 옷처럼 점점 옅게 색이 바래지고 있다. 특히 명절을 즐기는 것조차 눈치 보이는 올해는 더욱 그렇다. 마치 액자 속 가족사진이나 오래된 유물처럼 집의 한가운데 남아 있는 거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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