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는 정책의 기조와 우선순위를 정하는 상위의 기준이지만, 현실의 정책은 가치 지향과 정책적 합리성 간에 균형을 요구한다. 진보는 더 이상 주류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비주류 소수파가 아니다.
김기식 ㅣ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장
지역화폐 관련 논란이 뜨거웠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심정은 솔직히 씁쓸했다. 지역화폐가 상당한 비용지출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으로는 소비와 고용의 순증 효과가 없다는 조세재정연구원 연구자의 견해는 학문적으로, 정책적으로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비록 매출 이전 효과라 하더라도 지역 소상공인의 매출 증대 효과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견해 역시 충분히 존중할 만하다.
문제는 어떤 차원에서 보느냐에 따라 있을 수 있는 다른 견해가 합리적으로 토론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력 대선주자가 거친 언사로 정치적 비난을 하고, 조사와 문책까지 요구하면서 내용보다는 의도성 논란이 더 커졌고, 마치 옳고 그름의 문제인 양 왜곡됐다. 더 나아가 어떤 입장이냐가 특정 대선후보에 대한 정치적 태도를 가르는 잣대로 여겨지기도 했다. 과도한 정치적 접근이 정책 논의를 왜곡한 매우 좋지 않은 사례다.
정책 논의는 가치 지향이 과도하게 투영되어 왜곡되기도 한다.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에서 의료급여가 제외된 것에 대한 일부 진보진영의 비판이 날카롭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지원하는 공공부조제도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이 가진 문제는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다면적이다. 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건강보험 가입자 중 연간 투약일수 1000일 이상인 환자는 2010년 14만6천명에서 2016년 36만5천명으로 증가했다. 연간 외래진료일수가 150일 이상인 환자도 2010년 13만9천명에서 2016년 20만7천명으로 증가했다. 2016년 의료급여 수급자 152만명 중 외래진료 상위 5%는 연평균 334회, 상위 10%는 연평균 284회를 이용했다. 본인의 비용부담이 없거나 경미하기 때문이다. 만성질환의 특성도 고려해야 하고, 민간 실손의료보험도 한 원인이지만, 의료급여제도의 보완이 필요함도 부인할 수 없다.
의료기관 과잉 이용으로 인한 재정 낭비를 막는 유력한 방안은 주치의 등록제다. 등록된 주치의에게만 1차 진료와 처방을 받게 하면 주치의가 매일 혹은 하루에 몇 번씩 진료와 처방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료급여 확대는 주치의 등록제 등 보완책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먼저 폐지한 후 논의하자거나, 이런 논의 자체를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어려운 분들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치환하면 정책 논의가 합리적으로 되기 어렵다.
노인빈곤율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이 40% 중반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라는 것을 근거로 현행 70%인 기초연금 대상자를 전국민으로 확대하고, 연금액도 증액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2018년 통계청 주택소유통계를 보면, 60대 가구주의 주택소유율은 68.7%로 40~50대보다 높고, 70대는 69.1%로 모든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 80대 이상도 57.2%로, 30대 41.8%보다 높았다. 노인빈곤율은 소득만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노인층의 자산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연구에 따라 노인빈곤율이 20% 안팎 내려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2008년부터 2016년 사이 533조원이 상속·증여되었다. 2016년 국내총생산(GDP)의 30%가 넘는다. 재벌만이 아니다. 상속 재산의 65.9%가 부동산이었다. 고도성장기에 형성된 자산의 세대 이전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산은 자녀에게 사적으로 이전되고, 부양은 국민이 공적으로 부담하는 구조가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이시디 평균 기초연금 지급률은 22%다. 무조건 혜택을 늘리는 것이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정책수단은 아니다. 자산과 소득이 있는 노인에게까지 기초연금을 주느라 하향 평준화하기보다 빈곤선에 있는 노인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이 노인빈곤율 하락에 더 효과적이다.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고용보험 확대가 논란이다. 그러나 사용자가 복수인 비전속특고의 경우 해법이 간단치 않다. 사용자 부담분을 특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9대 국회 대리점법 제정 논의 당시 우선 전속대리점부터 적용하자는 대안을 관련 단체들이 끝내 거부해 입법이 무산된 바 있다. 이번에는 법 개정을 늦추기보다는 전속특고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이런 논의를 태도와 의지의 문제로 치환하면 곤란하다.
가치는 정책의 기조와 우선순위를 정하는 상위의 기준이지만, 현실의 정책은 가치 지향과 정책적 합리성 간에 균형을 요구한다. 진보는 더 이상 주류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비주류 소수파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다수파가 된 주류답게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현실에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문제 해결의 역량과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