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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리 안의 소록도

등록 2006-01-19 21:57

김회승 논설위원
김회승 논설위원
아침햇발
“사람들이 징과 꽹과리 치며 몰려왔다. 천막 안으로 도망치니까 죽창을 마구 찔러댔다. 귀가 잘려 나가고 피가 나고 난리였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나가도 죽을 것 같아서 구석에서 죽은 척하고 숨어 있었다.”

1957년 8월, 경남 사천의 작은 섬 비토리에서 농지를 일구려던 한센인 28명이 죽창에 찔리고 불에 타 숨졌다. 학살의 주범은 ‘문둥이와 같이 살 수 없다’는 이웃 주민들이었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생존자들의 증언과 기억은 끔찍하리만큼 생생하다.

한센인들은 63년 전염병 예방법이 개정돼 법적 격리가 해제된 뒤에도 정착촌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일명 ‘후리가리’로 불린 일제단속에 걸리면 영락없이 소록도 등 정착촌으로 끌려갔다.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속설 때문에 툭하면 유괴범으로 지목됐고, 감염 우려가 없는 한센 병력자와 2세들도 일반 학교에 다니는 건 불가능했다. 80년대 후반까지도 “정관수술을 해야 방을 준다고 해서” 결혼 전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다.

지금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약물치료로 99% 완치될 뿐 아니라 유전성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말로는 한센인과 이웃으로 사는 게 ‘별 문제 없다’(63%)거나 ‘아무렇지도 않다’(11%)고 하지만, 실제 동네 목욕탕이나 이발소를 함께 이용하기 꺼리는 이가 대부분(80%)이다. 정착촌에 격리하는 건 불가피한 조처(60%)이고, 한센인 2세와의 결혼은 생각할 수 없는 일(87%)이다.(국가인권위원회 설문조사)

어디 한센인뿐이랴. 동네 근처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설 양이면 ‘주민 일동’은 어김없이 ‘결사반대’ 펼침막을 내건다. 성적 소수자와 에이즈 감염자는 그들이 ‘변태’인 게 문제이고, 이주노동자들은 웬만큼 홀대해도 괜찮은 것 아니냐고 여긴다. 예비역들한테는 신념이건 뭐건 군대를 거부하는 젊은이들이 얄미울 뿐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은 곳곳에 내면화돼 있다. 한센인이 그러하듯, 장애인, 이주노동자, 새터민(탈북자), 동성애자 등과 이웃으로 사는 건 왠지 불편하고 달갑지 않다. 요즘 국가인권위원회에 열심히 돌팔매를 던지는 보수언론과 재계의 논리는 이런 이중성, 홍세화씨의 말을 빌리자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에 교묘히 기대고 있다.

따지고 보면 편견과 차별에 맞선 싸움꾼은 인권위가 아니다. 살색이 살구색으로 바뀌는 과정에는 당돌한 초등학생들이 있었고, 강제적인 일기장 검사를 아동 인권 침해라고 진정한 이는 한 초등학교 교감이었다. 키가 1㎝ 모자라 경찰 꿈을 이루지 못한 젊은이의 호소는 공무원 채용 때 신체규정을 철폐하라는 권고를 이끌어냈다. 인권위는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경청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국가 정체성까지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닌 듯하다. 살색이 살구색으로 바뀌었다지만 이주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척박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지금도 묵묵히 1년6개월의 감옥행을 택하고 있다. 경찰 신체규정 폐지 권고는 “그럼 필기시험도 차별이냐”는 경찰 총수의 말 한마디에 묻혀 버렸고, 비정규직 차별에 대한 의견표명은 노동부 장관이 나서서 “잘 모르면 용감하다”고 일축하지 않았는가.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은 생전에 “비극은 악한 사람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라며 사회 전체의 자성을 촉구했다. 우리 안의 소록도는 여전히 많다.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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