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내가 추구했던 모든 인간적인 것들의 권위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언어가 자라났다. 몸으로 말하고 현재를 살며 서로의 작은 몸짓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동물적 언어.
홍은전 ㅣ 작가·인권기록활동가
1970년 미국의 영장류연구소에서 침팬지의 언어능력을 연구하던 로저 파우츠 박사는 어린 침팬지였던 부이에게 수어를 가르쳤다. 부이는 50개 이상의 단어를 외웠고 문장을 만들어 질문했으며 세계에 대해 논평할 수 있었다. 연구소는 동물들에게 위험한 곳이었다. 침팬지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외로운 케이지에서 나가게 해달라고도 했다. 파우츠는 자신이 ‘친절한 간수’ 같다고 생각했다. 연구가 끝나자 그는 죄책감을 안은 채 떠났고 부이는 동물실험을 하는 곳으로 팔려 갔다. 그곳에서 과학자들에 의해 고의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13년간 케이지에 갇혀 혼자 지냈다.
세월이 흘러 파우츠는 방송사로부터 침팬지의 현실을 다루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고 방송이 부이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기대에 출연을 결심했다. 1995년 둘은 다시 만났다. “안녕, 부이. 나를 기억해?” 부이는 무척 기뻐하며 손가락을 머리 한가운데로 그었다. 그것은 25년 전 파우츠가 부이에게 붙여준 수어 이름이었다. “부이, 나 부이야.” 부이는 파우츠에게 손을 내밀었고 침팬지의 애정 표현인 털고르기를 해주었다. 파우츠는 이렇게 썼다. “인간이 한 모든 짓에도 불구하고 부이는 여전히 순수하다. 이처럼 너그러운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방송이 나가자 대중들의 격렬한 반응이 일었고 부이는 비영리 동물보호소로 옮겨졌다. 이것은 수나우라 테일러가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에 대해 쓴 책 <짐을 끄는 짐승들>에 나온 이야기다. 초점을 잃었던 부이의 눈빛이 파우츠를 알아보고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을 순간을 상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난다. 하지만 이 가슴 시린 이야기의 끝에 테일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왜 수어를 모르는 침팬지는 외롭게 감금되고, 그렇지 않은 침팬지는 대중적 항의를 불러일으키는가. 언어는 어떻게 그런 권력을 갖게 되었나. 우리가 케이지에서 꺼내고 싶은 것은 침팬지가 아니라 언어라는 인간적 능력이 아닌가.”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힌 채 몇 개월을 보냈다.
나는 인권이 짓밟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장애인이나 부랑인수용소의 생존자 같은 이들을 만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어이 말하게 하고 그것을 글로 바꾸는 일이다. 삶이 부서진 사람들의 말은 갈가리 찢기고 조각나 있기 일쑤였다. 장애 때문이기도 하고 낮은 교육수준이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했다. 그 파편들을 모아 거기에 논리와 서사를 부여하는 일,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게 내 역할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기록한 글을 보며 자주 공허함을 느꼈다. 현실의 그들은 ‘짐승처럼’ 울었는데 글 속엔 ‘인간’만 보일 때 그랬다.
출구가 필요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인간의 공감을 얻으려면 인간의 언어를 써야 했다. 인간이란 비장애인이고 그 언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서울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파우츠 같다고 생각했다. 언어를 통해 누군가의 해방을 도우려는 인간의 모순과 번뇌를 알 것 같다고. 그러나 시간이 점점 갈수록 나는 내가 부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갇힌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기록하면서 나는 언어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알아갔다. 그리고 그만큼 두려움도 커져갔다. 내가 만난 인간들은 내가 가진 언어보다 언제나 훨씬 더 복잡했고 거대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출구를 찾아 헤매는 기분이었고 제대로 된 언어만이 그 열쇠라고 믿었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고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해방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단어와 문장, 이성과 공감 같은 것들로 꽉 차 있던 나의 감옥에 작은 고양이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온 날이었다.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내가 추구했던 모든 인간적인 것들의 권위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언어가 자라났다. 몸으로 말하고 현재를 살며 서로의 작은 몸짓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동물적 언어. 그것이 미치도록 좋았다. 불안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엔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그는 몸통 어딘가를 울려 그르렁그르렁 낮은 진동소리를 낸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언어가 흉내 낼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며 잠이 든다. 동물의 해방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마음은 공감이나 죄책감 같은 인간적인 것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내가 너무 인간인 것에 지쳤고 동물적인 관계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해방감을 느낀다. 기쁨만큼 슬픔을 바라볼 힘이 생기고 해방감만큼 책임감이 생긴다. 나는 동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