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낙태죄 관련 정부의 개정법률안이 입법예고되었다. 무책임하고 아픈 말들이 수없이 흘러나왔다. 인공 임신중단을 결정한 이들을 태아살해범 또는 무책임한 여성으로 간단히 프레이밍하는 말들. 인공 임신중단을 마치 감기약 먹고 감기 치료하는 행위인 양 가볍게 여기는 말들. 그중 가장 가혹한 말은 이것 아닐까.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낙태는 처벌해야 한다.”
낙태를 처벌하여 태아를 보호하겠다는 시각은 인공 임신중단의 원인을 모체인 여성의 결정에서만 찾는다. ‘임신한 여성이 출산 및 양육을 하지 않고 인공적으로 임신중단을 하는 바람에 태아의 생명이 침해된다.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여성의 임신중단 결정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임신중단한 여성을 처벌해야 한다.’ 그 결과가 낙태죄다. 이 논리 아래서는 임신과 양육에 대한 친부와 공동체의 책임이 삭제된다. 마치 여성 혼자 임신을 하고 여성 혼자 출산하며 여성 혼자 양육하는 것 같은 기적의 논리가 완성된다. 인간은 정글에서 살아가는 자웅동체 생물이었던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묻는다. 인공 임신중단의 원인은 무엇인가. 낙태죄로 인공 임신중단을 막
을 수 있는가.
인공 임신중단의 원인은 산모의 무책임이 아니다.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의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 첫번째 원인이다. 이는 성교육의 부재와 성범죄에 대한 좁은 규정에서 비롯된다. 학교에선 청소년들에게 상대방을 존중하는 성교와 안전한 피임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육하지 않는다. 성교할 때 언제 어떻게 콘돔을 착용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다. 음성적인 경로로 주워들은 잘못된 정보로만 무장한 사람들은 질외사정과 생리주기 계산을 피임법이라고 오해한 채 콘돔 착용 없이 성교에 들어간다. 삽입 직전 내지 성교 도중 콘돔을 빼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식으로 피임 없는 성교가 이루어진다.
친부의 양육책임 불이행과 비협조적인 양육환경이 두번째 원인이다. 임신과 양육에 대한 책임을 반분하겠다는 친부가 존재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양육환경이 갖춰졌을 때 산모가 인공 임신중단을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남성이 친부임을 부정하거나 양육책임을 불이행할 때 이를 쉽고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단이 없다. ‘맘충’이란 멸칭과 노키즈존이 흥행하는 우리 사회는 양육에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환경에서 여성에게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란 단순히 열 달 임신해서 가볍게 출산하고 말 일이 아니다. 세상에 내놓은 한 생명을 홀로 책임져야 한다.
임신과 출산, 양육을 홀로 책임지도록 내몰린 여성들이 낙태죄 때문에 인공 임신중단 결정을 포기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처벌을 받을지언정 인공 임신중단을 한다. 부담해야 할 책임이 가혹할 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낙태죄는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실효적인 수단이 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도 낙태죄는 낙태를 줄이기보다는 인공 임신중단을 한 여성들에 대한 협박사유로 활용되고 있다.
결국 낙태죄는 “출산 및 양육을 할 수 없는 여성들에게 안전한 인공 임신중단 의료를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불법적인 인공 임신중단을 감수하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를 결정한다. 낙태죄는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말로 태아를 보호하고 싶다면, 청소년들에게 상대를 존중하는 성교의 의미와 안전한 피임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성교 시 콘돔 착용 여부에 대한 의사합치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스텔싱(성관계 중 합의 없이 피임기구 제거)이 행해진 경우 규제하고, 남성의 친부로서의 책임을 강화하고, 미혼모 차별을 금지하고, 좀 더 양육에 친화적인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구조적인 원인은 방치한 채 낙태라는 결과만 처벌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태아는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임신을 유지할 수 없는 여성에게 위험하고 불법적인 인공 임신중단만을 강요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처벌과 방치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인공 임신중단을 줄여 궁극적으로 태아와 여성을 모두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인공 임신중단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우리 정부는 헌법재판관들의 고민을 충실히 반영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