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도발한 쪽은 미국이다. 망명자 천여명을 군대로 만들어 1961년 4월에 쿠바의 히론 바닷가에 상륙시켰다. 쿠바 사람이 옛 독재자를 그리워하며 봉기를 일으키리라 믿었다나. 그런 일은 없었다. 악명 높은 ‘피그스만 침공’은 미국의 참패로 끝났다. 소련 역시 만만찮은 일을 저질렀다. 쿠바에 몰래 미사일 기지를 지었다. 미국 곳곳에 핵미사일을 날리면 어떻게 될까. 정찰기가 찍어온 첩보사진을 보고 케네디와 미국 정부가 발칵 뒤집힌 날이 1962년 10월16일이다.
미국과 소련이 금방이라도 핵전쟁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때 나는) 3차대전이라고도 하고 신의 심판이라고도 하는 미지의 공포 앞에서 인류의 멸망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1992년 <한겨레>에 실린 정운영의 회고다. 그럴 만했다. 케네디와 흐루쇼프, 두 나라 지도자가 서로 엄포를 놓아댔으니.
다행히 두 나라 정부는 전쟁할 생각이 없었다. 눈에 안 띄는 곳에서는 대화했다. “외교사의 전설, 국제정치 이론의 원천, 위기 리더십의 상징, 협상학 개론의 단골 사례.” 2013년 <한겨레21>에 실린 김연철의 평이다. 케네디는 비밀채널을 열심히 이용했고 흐루쇼프도 기꺼이 협상에 응했다. 13일 만에 쿠바 미사일 위기는 끝났다. 쿠바는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강대국 장기판의 말로 이용당했으니. 체 게바라가 다른 나라의 반제국주의 게릴라 활동을 지원한다며 쿠바를 떠난 것도 이 일이 배경이라는 설명이 있다.
아무려나 케네디가 잘한 일로 꼽힌다. 전쟁의 위기를 평화의 기회로 바꾸었으니 말이다. 이듬해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미국과 소련은 평화 대화에 나서게 되었을까도 궁금하다. 북핵과 미사일 소식으로 갑론을박할 때마다 이야기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