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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멈추지 않고 살아갈 준비 / 조문영

등록 2020-10-28 14:51수정 2020-10-29 10:40

조문영 l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지난 주말 한국반빈곤영화제에 다녀왔다. 4년 만에 열리는 영화제는 코로나19라는 예기치 않은 사태로 진통을 겪었지만, 다행히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조정되면서 온라인 실시간 방송과 오프라인 상영회를 병행했다. 올해 영화제의 슬로건은 ‘누가 집값을 올리는가’였다. 부동산 지도에서 매매가로만 등장하는, 자본과 대중의 공모로 매 순간 지워지는 도시의 장소, 사람, 역사를 돌아보자는 취지다. 기획팀이 방역 수칙을 따르면서도 멈추지 않을 해법을 끈덕지게 고민한 덕택에, 영화의 메시지뿐 아니라 현장의 증언, 관객의 응원, 자원활동가의 노고를 함께 느끼는 자리가 됐다.

단편 세션에서 상영된 노량진수산시장 투쟁현장은 처참했다. 2013년 서울시는 노량진수산시장을 다음 세대가 기억해야 할 ‘미래유산’으로 선정했지만, 복합 리조트를 만들겠다는 수협의 ‘현대화’ 사업은 물려줄 가치가 비린내와 땀내가 엉킨 노동의 현장인지, 부동산 투기인지 헷갈리게 한다. 육교에 매달린 채 저항하던 여성들을 소방대원이 끌어내고 옛 시장건물의 철거를 끝냈을 때, 김은석 감독의 카메라는 탈진한 채 흐느끼던 상인들과 박수로 환호하는 용역 깡패들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코로나와 자연재해가 다른 화제를 삼켰던 지난 7월의 일이다. 지브이(GV, 관객과의 대화)에서 박은선 감독은 울음을 터뜨렸다. 4년 전 서대문형무소 옆 ‘옥바라지’ 골목이 철거될 때에도 동일한 박수를 목격해서다. 도시재생, 보존 등 ‘착한’ 개발의 언어는 넘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에서 쫓겨나는 역사는 단절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강연화 노량진수산시장현대화 비상대책총연합회 부위원장은 한국을 “있는 자만을 위한 나라”로 표현했다. “시위하면 화장실부터 막아요. 권익위(국민권익위원회)를 찾았을 때도 똑같았어요.”

영화제는 한국 바깥의 비참에도 시선을 보탰다. <싼허에는 사람이 있다>는 중국 선전(深圳)을 떠도는 농민공에 관한 다큐이다. 카메라는 도시로 올라와 인력시장과 피시방, 낡은 국숫집을 전전하는 한 청년의 일상을 좇는다. 탄형은 호텔에서 온종일 서빙하고 받은 몇푼마저 지하철이 끊겨 교통비로 떼였다. 공사장에서 일하다 발바닥에 쇠못이 박혔는데도 알아서 의사를 찾아가라는 무심한 답변만 돌아왔다. 자신이 “착취”당한다는 걸 정확히 알지만 억울한 일이 되풀이되다 보니 ‘될 대로’ 살아간다. 탄형 같은 청년들이 온라인에서 “싼허의 전설”, “하루 벌어 사흘 노는” 잉여로 회자되면서 이들의 ‘기이한’ 행각을 좇는 여행자도 생겼다. 보통 사람, 자립할 수 있는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던 탄형은 어느 순간 카메라에서 사라졌다. 감독은 그와 연락이 끊겼지만, 다큐를 관람한 한국의 홈리스는 그의 무덤덤한 슬픔에 공감하면서 우리 사회의 폭력을 되짚는 질문을 던졌다.

영화제 폐막작인 <감염병의 무게>는 올해 초 코로나바이러스가 대구를 삼켰을 때 장애인과 장애인 지원 단체 활동가가 직면했던 초현실적 상황을 담았다. 두 사람이 2m 거리를 두기 힘든 좁은 방에 사는 한 장애인은 결국 활동지원사 없이 두 주를 버텨야 했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코로나 지원책이 없다 보니 활동가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방호복을 직접 갖춰 입고 장애인 확진자를 지원하고, 자가격리가 필요한 장애인과 아예 동거하기도 했다. 장호경 감독이 강조했듯, “중산층”, “비장애인”, “정상가족”을 표준으로 삼은 정부의 방역대책은 장애인의 감염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 그만일 예외 상태로 제쳐두었다.

상영마다 감독, 관객, 활동가, 빈민과 장애인이 자리를 함께한 덕분에 영화제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연대의 장이 되었다. 노들장애인야학 명희 활동가는 코로나 시기 중증장애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리두기가 더 큰 생존의 위험이 될 수 있다면서 “우리는 뭉쳐야 사는데 흩어져야 산다고만 말하는 상황”을 좀 더 비판적으로 볼 것을 제안했다. 앞으로도 코로나19와 같은 위기가 반복된다면 ‘무조건 멈춤’이 능사일까? 자기만의 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지속 가능한 매뉴얼 대신, 모든 사람이 멈추지 않고도 적당한 시차와 간격을 지켜가며 공생할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반빈곤영화제는 우리가 어떤 이유로 코로나 방역에 동참하고 있는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노력이 좌절된 채 강요되는 안전 수칙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묻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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