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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노동법의 존재 이유 / 류영재

등록 2020-11-08 18:32수정 2020-11-09 10:29

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가끔 ‘과로사’ 인정 여부가 쟁점인 사건들을 재판했다. 사망진단서에 기재된 사인은 다양했으나 ‘과로사’란 사인은 없었다. 생소한 사인들과 과로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일은 재판부의 몫이었다. 재판을 통해 마주하는 고인의 삶은 보통 고단했다. 그 고단한 삶을 살펴 노동 강도를 분석하는 일, 고단함이 어떻게 사인과 연결될 수 있는지 전문가들의 의견과 참고자료를 읽어 내리는 일, 최대한 구체적으로 고단함을 재현하는 일 또한 고단했다. 고단한 우리는 고단했던 자의 사망을 판단하면서 너무 과로하진 말자는 덕담을 주고받았다. 만일 법원의 판결이 과로사 인정에 인색하다면 그것은 판사들 스스로 지나치게 과로하다 보니 무엇이 과로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일 것이라고 자조했다.

노동법은 고단함을 막기 위해 등장했다. 사적 자치와 계약자유의 원칙이 지배하는 민법에 익숙해져 있다가 노동법을 접하면 생소하다. 예컨대 근로기준법은 대부분 강행규정이라서 당사자들이 근로조건을 법정 기준보다 열악하게 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최저임금과 노동시간 제한이 있는데, 이는 노동자가 원한다고 하여 더 많이 일할 수 없고 더 조금 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언뜻 보면 불합리하다. 사용자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사람이 필요하고 노동자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싶다는데, 사용자는 낮은 월급이라도 주면서 직원을 고용하고 싶고 노동자는 낮은 월급을 받더라도 일을 하고 싶다는데, 법에서 이를 금지하다니. 이런 규제는 노동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왜곡하고 성장을 위축시키며 결과적으로 실업자를 양산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무엇보다 임금의 최저기준과 노동시간의 한계를 정하면 인건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누구도 증가한 비용을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즉, 사용자도 노동자도 소비자도 좋아하지 않는 법이 노동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법은 왜 등장했는가. 이 법으로 고단함을 막을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동법 덕분에 그나마 인간이 값싸고 대체 가능한 노동력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었다. 근로조건이 수요와 공급으로만 결정될 때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은 그의 삶을 삼킨다. 얼마나 더 낮은 급여를 감수하고 잠을 줄일 수 있는지에 따라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될 때, 노동자들은 한없이 자신을 낮췄다. ‘살기 위해 하는 일이니 살 수 없을 지경까지 일하진 말아야지’라는 합리적인 선택지가 주어지진 않았다. 그럼에도 노동으로 인한 삶의 상실은 노동자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갔다. 떨어져 나간 이들을 채울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사람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노동권의 발견이다. 노사 간의 근로조건 교섭이 대등해질 수 있도록 노동자들의 지위를 강화하고 노동이 사람을 죽이는 수준에 이르지 않도록 근로조건의 최하한을 강제하는 규범이 만들어졌다. 노동법의 탄생이다. 노동법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역설―살기 위해 하는 노동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는 역설―을 교정하기 위해 사적 자치와 계약자유의 원칙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노동법을 해석할 때 민법상의 사적 자치와 계약자유의 원칙을 섣불리 도입할 경우 노동법의 의의를 몰각하게 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플랫폼 노동자 등 임시 노무제공자들의 노동환경이 문제가 된다. 외관은 자영업이지만 노동조건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극한에 내몰린 사례가 계속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배달대행노동자, 택배노동자 등이 있다. 이들이 근로기준법의 적용 대상인지에 대해 한창 논의되고 있는데, 근로기준법 적용 여부를 떠나 어떤 노동자도 노동으로 인해 삶을 포기당해선 안 된다는 점이 우리 사회에 명확히 새겨져야 한다. 총알배송이나 새벽배송에 합당한 대가가 제공되어야 하고, 그 서비스들이 얼마나 일상의 혁신을 제공하든지 간에 노동자의 건강을 삼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서비스라면 규제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참고로, 노동환경의 조성에 있어 프랑수아즈 사강의 “나는 나를 해칠 권리가 있다”는 명언의 적용은 배제되어야 한다. 내 옆의 판사가 주말 없이 매일 밤새우며 일하면, 나도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판사 사회의 평균적인 성실함이 되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결이 노동자들의 과로사 인정에 인색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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