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김기식 칼럼] 우리 시대 진보란 무엇인가

등록 2020-11-10 14:08수정 2020-11-11 02:39

모두 진보의 기반인 노조, 특히 대기업, 공공부문 노조의 저항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것에 도전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으면서 청년세대에게 진보에 투표하라 할 수 있는가. 86세대의 20대가 진보였던 것이 시대의 반작용이었다면, 지금 20대의 보수화는 기존 진보세대의 도그마와 이루어놓은 기득권에 대한 안주, 감성의 차이 때문이다.

김기식 ㅣ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장

1990년대까지 시대를 가르는 기준은 민주 대 반민주였다. 그리고 1997년 정권교체 이후 진보와 보수라는 기준이 정치사회적으로 자리 잡았다. 진보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를 만들자고 나섰을 때 당시 운동권 동료들로부터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념이 진보를 규정한 시대였다. 당시 필자에게 진보는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모든 고정관념과 기득권을 거부하고, 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한때 진보적이었던 것도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변하면 도그마이자 기득권이 되고, 그것을 고집하면 보수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정치적으로 처지가 바뀌었다고 입장이 교차되고, 가치나 국민의 삶과 동떨어진 정치적 프레임이 지배하는 오늘의 정치 현실에서 과연 진보와 보수는 정치적 잣대로서 유의미하게 국민에게 수용되고 있는가. 현실 정치는 그렇다 치고, 가치를 실현하는 미래 비전에서 진보는 구조적인 문제에 얼마나 솔직하며, 변화된 현실 앞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혁신하고 있는가.

90년대 이후 진보는 과거 수정주의라고 비판했던 사민주의를 수용하며 스웨덴을 모델로 한 복지국가를 꿈꿨다. 그러나 오늘, 그리고 미래의 대한민국에서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은 실현 가능한가. 필자가 이해하는 한 스웨덴 모델은 높은 경제성장률, 피라미드형 인구구조, 사실상의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오늘 대한민국이 직면한 현실은 저성장의 구조화, 저출생과 고령화로 인한 역삼각형 인구구조, 높은 청년실업률과 불완전고용의 확산이다. 이 조건은 정책을 잘한다고 예측 가능한 미래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경제활동인구가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지비용을 부담할 미래의 청년세대에게 복지국가는 희망일 수 있을까. 이런 조건에서 지속가능한 현실적 최선은 국가가 ‘국민복지기본선’을 설정하고,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지키는 것일지 모른다.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구조화된 복지제도를 부채로 충당할 수는 없다. 증세가 불가피하다. 그런데 어제 세율을 인상하고, 오늘 감세를 추진한다. 노동자의 반이 면세자이고, 자영업자 면세 기준도 상향되었으며, 각종 조세 감면제도는 계속 연장되고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기존 복지국가체제든, 기본소득이든 부자 증세로 재정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거의 곡학아세 수준의 주장이다. 복지제도로 돌려받더라도 소득이 있으면 1원이라도 세금을 내는 사회가 되어야 고소득자, 자산가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라 할 수 있다. 스웨덴은 진보가 역진적이라 비판하는 간접세인 소비세가 25%이고, 거의 모든 국민이 세금을 납부하며, 현금복지급여에도 세금을 부과한다. 진보는 어떻게 복지국가의 미래를 감당할 것인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는 물론 노동시장에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격차도 점점 벌어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연공급 임금구조는 노동자 안에서도 기성세대의 기득권이다. 3차 산업 중심의 고용구조하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이 대책일 수 없다. 노동권이 강한 독일조차 2017년 기준 비정규직 비율은 35.1%로 32%인 우리보다 높다. 그런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 주장되고, 임금구조 개편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연차에 따라 임금이 정해지는 연공급 구조는 직무급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상시업무의 정규직화는 당연하지만, 산업구조상 발생하는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임금 등 차별을 금지하고, 나아가 시간당 임금을 정규직보다 더 주도록 하는 것이 실질적 대책이 될 수 있다. 개별 기업 차원이 아니라 산별 교섭을 통해 독일처럼 대기업의 인상폭은 낮추고, 중소기업의 인상폭은 높이는 연대임금전략이 실행되어야 한다.

모두 진보의 기반인 노조, 특히 대기업, 공공부문 노조의 저항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것에 도전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으면서 청년세대에게 진보에 투표하라 할 수 있는가.

진보는 20대의 보수화를 우려한다. 86세대의 20대가 진보였던 것이 시대의 반작용이었다면, 지금 20대의 보수화는 기존 진보세대의 도그마와 이루어놓은 기득권에 대한 안주, 감성의 차이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결핍된 진보의 집단주의는 보수의 국가주의와 다르지 않다. 국가의 성장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한 보수, 조직과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 진보가 오늘의 세대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질까.

우리 시대 진보는 특정한 이념과 정책이 아니다. 끊임없는 성찰, 모든 절대적인 것에 대한 회의, 변화에 대한 담대한 도전만이 진보를 진보답게 한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