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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광화문 탱크와 경복궁 BTS

등록 2020-11-11 15:33수정 2020-11-12 02:38

1972년 10월17일 서울 광화문 앞에 등장한 탱크. <한겨레> 자료사진
1972년 10월17일 서울 광화문 앞에 등장한 탱크. <한겨레> 자료사진

광화문 앞에 탱크가 서 있었다. 긴 포신과 기관총은 광장을 향했다. 경복궁 담장을 따라 군인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있었다. 1972년 10월17일, 화창한 가을 아침 고등학교 2학년 등굣길에 마주친 ‘10월 유신’ 첫날 풍경이었다. 첫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광화문 앞 탱크 못 봤어? 멋지지 않니?” 그중 한명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민주주의가 죽었는데 뭐가 멋있어?” 갑자기 머쓱했다.

다음 시간부터 수업 내용이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자꾸 “민주주의가 죽었는데…” 하는 말이 맴돌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통일’을 위해서 ‘유신’을 한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남북회담이 거듭되며 통일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었다. 그래도 ‘통일’을 위한 ‘독재’라는 건 억지 같았다. 점심시간부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교가 모두 휴교됐으니, 고등학생인 우리라도 생각을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쉬는 시간마다 모여든 친구들이 모두 7명이 되었다. 우리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교내에 배포했다. 며칠 만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 유치장,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를 거쳐 서대문구치소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유신의 찬바람이 불던 서대문은 춥고, 어둡고, 무서웠다. 천진난만한 나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서둘러 끝났다.

1972년 12월27일, 남한의 ‘유신헌법’과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이 같은 날 공포됐다. 남쪽 유신체제 대통령과 북쪽 유일체제 주석은 그렇게 나란히 짝을 이루었다. 서로 상대방 때문에 독재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종신권력인 지도자 주변에서 계속 특권을 누리려는 무리들은 권력자의 아들딸을 미래권력으로 추대했다.

북한의 김정일과 김정은은 바로 그렇게 떠오른 세습권력이다. 김정일 후계구도가 본격화된 1970년대 초부터 북한에서는 많은 책들이 금서로 사라지고, 널리 부르던 노래들이 금지곡이 되고, 복장과 두발에 이르기까지 생활 검열도 강화되었다.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가? 자유민주주의 남한에서도 유신 시대에 우리가 경험한 독재 권력의 통제 방식이다.

이미지를 조작하는 상징 정치도 추진됐다. ‘조선식 사회주의’ 북한과 ‘한국적 민주주의’ 남한 모두 충효 사상을 강조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이 ‘조선의 어머니’로, 남한에서는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자애로운 국모’로 추앙받았다. 남한의 박근혜는 육영수의 죽음 이후 22살 나이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하며, 의전서열 2위의 핵심 상징이 되었다. 충효를 강조하는 ‘새마음운동’ 전국대회를 진행할 때, 어린 ‘영애님’에게 교장 선생님은 90도 경례를 하고, 할머니들은 큰절을 올렸다. 남북 권력집단은 적대적으로 공존하며 특권을 세습했다.

결정적인 분기점은 남한의 민주화다. 남한 시민사회는 독재체제에 끊임없이 저항해서 1980년대 말부터 권력교체가 제도화됐다. 2012년 선거에 권력기관이 개입해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지만, 특권 배분과 권력 남용 끝에 결국 촛불혁명으로 탄핵당했다. 남한은 그렇게 정치적 권력세습의 고리를 끊었다.

2020년 10월 화창한 가을날 오후, 광화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지켜봤다. 울긋불긋 깃발을 들고 전통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동작을 취할 때마다 둘러선 외국 청년들이 박수를 쳤다. 방탄소년단(BTS)의 경복궁 뮤직비디오를 보고 왔다며 ‘멋지다’고 했다. 반세기 전 그 자리에서 탱크를 보고 ‘멋지다’고 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이만큼 달라진 세월을 돌아보니 그 하나하나의 변화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음반사전심의제가 살아 있었다면 방탄소년단의 노래와 춤을 어떻게 볼 수 있었겠는가.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사람들은 <기생충> 같은 영화를 만들지 못했고, 케이(K)-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적을 이롭게 하는 표현물이라고 처벌되었을 것이다. 민주화는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정치체제 변화만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몸과 마음을 깨쳐나가는 치열한 변화의 과정이다. 그 모든 변화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왔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엄연히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권력이 되살아난다면, 우리는 다시 검찰청과 구치소를 오가게 될 수도 있다. 찬바람 불기 시작한 광화문 앞에 서서,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순진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을 누비던 어린 학생들의 피켓 물결을 기억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세대를 넘어 되살아나는 순진한 마음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정병호 ㅣ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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