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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계의 창] 바이든은 민주주의를 갱신하지 못한다 / 슬라보이 지제크

등록 2020-11-15 15:56수정 2020-11-24 08:32

2020년 대선에서 당선자로 선언된 뒤 11월 7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당선연설을 하려는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오른쪽)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 연합뉴스
2020년 대선에서 당선자로 선언된 뒤 11월 7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당선연설을 하려는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오른쪽)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 연합뉴스

슬라보이 지제크ㅣ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남북전쟁 직후는 미국 민주주의가 새롭게 갱신된 시기다. 당시 미국 진보 세력은 모두 단결하여 흑인에게 시민권을 보장하는 수정헌법 14조를 추가했다. 일부 학자가 “제2의 헌법”으로 부를 정도로 미국 사회에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보편적 해방을 향한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최근 칠레에서도 민주주의가 새롭게 갱신되었다. ‘피노체트 헌법 폐기’ 개헌은 피노체트의 유산을 청산하고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 변화,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해방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갱신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이상적 상태로 돌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 과거와 급진적으로 단절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는 포퓰리즘적인 우파와 중도 좌파 사이에 일종의 내전이 일어난 시기다. 이제 트럼프가 패배했으므로, 미국은 민주주의를 다시 갱신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민주적 해방이라는 과정을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미국 민주당 중도파와 민주당 급진파가 연합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민주당은 지금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같은 급진파를 주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원은 공화당이 주도하고, 대법원은 보수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 바이든이 의미 있는 수준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이든 본인이 대변하는 이들도 급진적인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들이다. 오카시오코르테스 지적대로, 바이든이 진보적인 인사들을 행정부 주요 자리에 기용하지 않는다면 민주당은 2022년 중간선거에서 크게 패배할 공산이 크다.

미국은 지금 정확히 반으로 분열되어 있다. 바이든은 미국의 통합과 화해를 이루겠다고 말하지만 공허한 말이다. 트럼프가 미국이 치유되는 것을 가로막고자 애쓰는 한, 바이든은 미국을 치유하지 못할 것이다. 트럼프가 우연히 대통령이 된 것도 아니고, 지금도 미국 국민 절반이 그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정헌법 14조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시민권에 반대하는 남부 민주당원들의 저항으로 제도적 인종주의는 1960년대까지 100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바이든 임기 중에 일어날 수 있다.

이번 미국 대선의 분명한 승자는 따로 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거대 자본들, 그리고 미국 연방수사국과 국가안보국 같은 ‘심층 국가’ 장치들이다. 힘이 약한 바이든 행정부, 그리고 공화당이 주도하는 상원은 그들이 원한 최상의 결과다. 거대 자본과 심층 국가 장치가 원하는 대로, 트럼프의 기행이 사라지면서 국제무역과 정치 공조는 원래 상태로 돌아갈 것이고, 상원과 대법원은 급진적인 조치들을 막아줄 것이다. 이런 상황은 트럼프가 2024년 재집권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진보’의 승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곧 패배가 되는 역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트럼프가 패배한 이 시점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트럼프가 미국 국민의 절반을 어떻게 유혹할 수 있었는지. 트럼프에게는 확고한 지지층이 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자기가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진심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 점에서 마이클 블룸버그나 바이든 같은 민주당 정치인들과 다르다. 트럼프는 지지자들의 근심과 걱정을 단순한 말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할 줄 안다. 자신이 그들을 걱정하고 그들의 존엄을 존중한다고 믿게 만들 줄 안다. 심지어 코로나를 다룰 때도 그는 사람들에게 위기는 곧 끝날 것이며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안심시키는 교묘하지만 ‘인간적’인 전략을 폈다.

사람들은 고작 아무런 중대한 변화도 가지고 오지 않을 이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을 최상의 결과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있다. 미국 정권이 평화롭게 교체되는 것만으로도 안도해야 하는 암담한 상황이다.

지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작지만 유일한 희망은 트럼프 시대의 유산 하나가 지속되어 미국이 세계 정치 무대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후퇴하는 것이다. 세계의 중심이 다원화된 상황에서 미국은 자신이 여러 국가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이 이를 인정해야 우리도 전세계의 운명이 미국의 무지한 바보들 몇천명의 표에 달려 있기라도 하다는 듯 미국 대선 결과에 겁에 질려 매달리는 모욕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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