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 강원 태백시의 한 탄광에서 광부들이 갱도에 갇히는 사고가 난 뒤 구조대원들이 막장으로 향하고 있다. 오늘날 택배노동자들은 새로운 막장에서 일한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조형근|사회학자
“23일 상오 2시45분 매몰광부 17명 중 선반부 7명, 후산부 1명, 감독 한봉택씨 사망, 막장광부 8명은 무사하다. 입구가 봉막되어 어떻게 할 수 없는 실정. 연층도 붕락된 듯. 입구를 뚫고 있으나… 3시30분. 성재야, 엄마와 같이 누나들과 아빠의 비참한 뒤를 밟지 말고 사나이다운 인간이 되어라. 당신은 운명이라 생각하고 성재를 교육하도록… 나의 마지막 부탁이오. 뒤의 문제는 형에게. 지금 3시30분이요. 애들을 잘 교육하여 주길 바란다. 운명이다. 작업을 착수하고 나오려는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변을 당했다. 전차 스파크 같다.”
1973년 11월23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고광업소에서 매몰 사고가 났다. 광부 17명이 숨졌다. 막장 광부 8명은 매몰 후 45분 정도를 더 버틴 것 같다. 갱내 감독 김종호(당시 35)가 그사이 유서를 썼다. 며칠 후 인근 갈래초등학교 전교생 1513명이 ‘광부 아빠 보호 운동’에 나섰다.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20여명의 학생들이 광업소 입구에 “아빠가 지킨 안전 엄마가 웃고 나도 웃고”, “아빠의 무사고는 우리 가정 행복 된다” 등의 표지판을 세웠다. 눈물을 흘리며 아빠들의 명복을 빌었다.
유족들은 대략 3년치 임금인 평균 129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누군가 법적 책임을 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책임은 온전히 가족 몫이었다. 아비 잃은 아이들이 아빠가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푯말을 세우고 슬피 울었다. 광업소가, 감독당국이, 정부가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 이 사고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해에만 12월 초까지 2798건의 탄광사고가 있었다.
47년 전 이야기다. 반세기가 흐르는 사이 야만의 세월은 가고 조국은 ‘선진국’이 됐다. 세계가 케이(K) 컬처와 케이 민주주의, 케이 방역에 감탄하고 있다는 시대다. 그리고 올해에만 택배노동자 14명이 과로사로 숨졌다. 지난 10월12일 숨진 택배노동자는 새벽 네 시가 넘어 귀가하면서 문자로 “저 너무 힘들어요” 하고 호소했다. 지난 4월29일에는 이천 물류센터 화재사고로 38명의 노동자가 숨졌다.
하루 평균 5.5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1994년부터 2016년까지 23년 동안 2년을 빼고 한국은 늘 산재 사망률 1위였다. 2015년 통계로 10만명당 산재 사망자가 영국은 0.4명인데 한국은 10.1명으로 20배 이상 높다.
흥미로운 점도 있다. 사망률과는 반대로 산재 사고 발생률은 평균의 4분의 1에 그친다. 사고 발생 자체는 무척 적은데, 사망률만 최고라는 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사망 사고 같은 대형 사고는 어쩔 수 없이 신고되는 반면, 대다수 산재는 신고조차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2020년, 케이 산재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막장은 살아있다.
대법원이 확립한 산업안전보건법의 산재 사고 처벌 판례에 따르면, 책임자의 지시나 기업의 업무 관행에 따라 노무를 제공한 사업장의 가장 ‘말단 근로자’가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업장 안전관리의 형사책임을 진다. 원청 대신 하청의 실무자가 책임을 지는 이유다. 처벌도 가볍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 하급심 판결 1714건을 분석한 고용노동부의 2018년 연구용역에 따르면, 자연인에 대한 평균 벌금액은 약 420만원, 법인에 대한 평균 벌금액은 약 448만원이다. 그 돈 내고 말지, 하게 만드는 소액이다.
정치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논의가 한창이라고 한다. 말단 근로자가 아니라 경영 책임자와 원청, 발주처 등 실질 책임이 있는 자들을 처벌하고, 반복될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도 강제할 수 있는 법이다. 고 노회찬 의원이 발의했던 법이기도 하다. 여당에서는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의 벌금을 올리자거나, 입법은 하되 50인 이하 사업장에는 몇년간 적용을 유예하자거나, 아무튼 ‘묘수’들이 나오고 있나 보다. 기업인 걱정이 느껴진다. 노동자도 걱정해주면 좋겠다. 위성정당이라는 편법까지 써가며 얻은 의석으로 정녕 무얼 하고 싶은 것인지 궁금해진다.
정부가 전태일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는 소식이다. 미싱사 시절 전태일은 동료 여공이 폐렴에 걸렸다며 해고되자 돕다가 해고됐다. 실 먼지 나부끼는 작업장에서 폐질환은 직업병이었다. 전태일을 현창한다면서 산재 처벌에 머뭇거리기는 어렵다. 그가 떠난 지 50년이다. 이제 그만 미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