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 ㅣ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50년이 되었다. 평화시장의 22살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분신한 지. 하지만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언론이 제대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조영래만이 그에 대한 기록을 모았다. 1978년 원고를 완성했지만 군부독재 아래 1983년까지 국내에서 출간되지 못한 채 몇몇 사람만이 돌려 보았을 뿐이었다. 그 원고가 지금의 <전태일 평전>이다.
이 평전을 읽다 보면, 집을 나온 어린 전태일이 더 어릴 때 살던 곳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부산의 섬 영도다. 그가 세상을 뜬 두달 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당시 영도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힘겹게 삶을 견뎌내고 있던 빈곤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 솔직히 자라는 동안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부모님이 그곳에 있었지만, 대학 시절에도 대학원 시절에도 부모님이 있기에 잠시 다니러 가는 곳이었다.
생각해 본다. 나는 왜 그곳으로 돌아가기 싫어했을까? 그랬다. 나는 자라면서 그곳에서 내내 지켜본 빈곤과 무지가 지독히도 싫었다. 그 빈곤과 무지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나는 ‘고향’이란 자리를 마음에서 지웠다. 유학은 그곳에서 가장 멀리 달아나는 결정이었다.
유학생활 동안 단 한번도 영도, 그곳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2011년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을 찾았다는 기사를 읽기 전까지는. 내가 70년대 후반부터 다닌 초등학교는 당시 대한조선공사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지금의 한진중공업이 있는 자리다. 바로 그곳에서 노동자 김진숙이, 주주들에게는 440억원을 배당하는 동안 경영 악화를 이유로 400여명을 정리해고하겠다는 사측의 시도에 맞서 85호 크레인 위에서 고공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김진숙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을 방문했다는 그 기사를 읽는 순간, 내 가슴이 말했다.
‘너는 빈곤과 무지를 경멸했지만, 단 한번이라도 그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노동자를 생각한 적이 있더냐. 그곳에서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오늘날의 네가 있는 것이 아니더냐. 넌 빈곤과 무지에 대한 경멸을 핑계 삼아, 열심히 살던 너의 부모와 동료들, 너의 이웃 사람들을 게으르고 구제할 수 없는 자들로 치부한 것은 아니더냐. 결국 너는 네가 그토록 경멸하는 빈곤과 무지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던 노동자의 자식이 아니더냐. 단 한번이라도 네가 가진 재능으로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응원한 적이 있었더냐. 너는 그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이라도 전한 적이 있었더냐.’ 그날 저녁 책상머리에 써서 붙였다.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마라.”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그의 죽음을 알렸던 조영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었다. 반면 전태일이 수많은 언론 앞에서 분신했음에도 언론은 사실을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요즘의 언론은 달라졌을까? 불행히도 희망버스가 사라진 자리에 수많은 언론들이 채워 넣고 있는 것은 “귀족노조”, “강성노조”, “폭력노조”, “철밥통”과 같은 일상적 표현들이다.
노동을 대하는 언론을 볼 때면, 희망버스를 만나기 전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언론은 진심을 다해 노동자를 응원한 적이 있던가? 아니 노동자의 현실만이라도 충실히 전달해 왔는가? 노동자들에 대한 언론 기사를 볼 때면, 무지하고 빈곤한 자들이, 그래야만 하는 자들이, 무지는 그대로 지니고 부당한 것을 과다하게 요구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 위기에서 기업의 요구는 정당하면서도 노동자의 요구는 부당한 것이 되는 걸까? 왜 사용자들 대신, 단결권을 행사하는 노동자들이 그러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해를 입힌다고 하는 것일까?
조지 오웰은 ‘어떤 발상은 너무 멍청해서 오직 지식인들만 믿을 뿐이다’라고 했다. 나는 지식과 노동은 대립한다는 발상, 노동자들을 무지한 자들로 취급하는 발상, 그래서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발상이 그런 것이라고 본다. 혹 우리 언론이 은연중에 이런 발상에 젖어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멀리 달아나려 해도, 펜을 쥔 이들 역시 이 거대한 자본의 세계에선 결국엔 다를 바 없는 노동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