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시적 정의와 법치주의 / 안영춘

등록 2020-12-09 15:38수정 2020-12-10 02:41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인 마사 누스바움은 전공이 철학과 문학인데, 1994년부터 이 대학 로스쿨에서 고전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강의를 했다. 그 강의에서 영감을 얻어 쓴 책이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명저다. 시카고대에서 미래 법률가들에게 문학 강의를 한 건 누스바움이 처음은 아니다. 1970년대 초부터였다고 하니 유서가 깊다면 깊은데, 우리에게는 몹시 낯설기만 하다.

법대나 로스쿨 강의실이라면 법리에 정통한 석학, 가령 70년대 미국 드라마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에서 입꼬리가 고집스럽게 처진 킹스 필드 교수가 학생들의 논리적 빈틈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풍경이 떠오른다. 소포클레스, 플라톤, 세네카, 디킨스를 읽는 누스바움 강의의 풍경은 사뭇 대조적이다. 밤잠 내쫓으며 법전을 외워야 하는 미래 법률가들에겐 부질없는 시간 낭비 아닐까.

<시적 정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법의 이성을 완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과정임을 인상 깊게 논증한다. 문학적 ‘감정’과 법률적 ‘이성’은 대칭 관계가 아니다. 법은 스스로 해석하지 못한다. 해석은 법률가의 몫이다. 그러나 법률가가 타자 안으로 스미지 못하고, 타자를 보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은 소멸하고 적용만 남는다. 문학은 법의 호흡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법과 문학,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이 지배한다. 우리 법률가들에게 누스바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대다수는 삼엄해야 할 법 집행을 앞에 두고 감성의 질척임에 빠지게 할 거냐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법 앞에서의 감성이야말로 법 이성의 겹을 켜켜이 쌓고 결을 세세히 살린다. ‘성인지 감수성’은 시(詩)가 법의 정의를 구현한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얼마 전 윤석열 검찰총장이 법치주의를 수호하겠노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말한 법치가 민주주의를 위한 운영체계(OS)를 뜻하는지 아니면 법의 지배를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어쩐지 섬뜩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민주주의에 복무하지 않는 법치주의는 법률가의 독재다. 그가 <시적 정의>를 가슴으로 읽어봤다면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