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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낙엽이 4번 져도 집에 못 간 독일군 / 권혁철

등록 2020-12-13 13:39수정 2020-12-13 18:41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4년 8월 초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들에게 한 말이다. 빌헬름 2세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 유럽 사람들은 전쟁이 2~3달이면 끝날 줄 알았다. 독일 황제의 장담과 달리 1차 세계전쟁은 4년 넘게 끌었다. 약 1천만명이 죽고, 2천만명이 다쳤다.

세계적인 전쟁사학자인 영국의 존 키건은 저서 <1차세계대전사>에서 “1차대전은 비극적이고 불필요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키건은 최초의 무력 충돌에 앞선 5주의 위기 동안 어느 때라도 대전의 발발로 이어졌던 사건들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김정섭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도 1차 세계대전이 “누군가 의도하고 준비한 전쟁이 아니라 위기관리에 실패해서 터져버린 전쟁”이고 “당시의 문제는 민간지도자들이 군부의 전쟁 주장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끌려다녔다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낙엽이 지기 전에-1차 세계대전과 한반도의 미래>)

1914년 여름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전쟁은 군인들이 잘 알 것’이라며 너무 믿고 맡겼다. 그 결과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는 “전쟁은 너무나 중요해 장군들에게 맡길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군에 대한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2차대전 때도 군국주의에 빠진 일본군이 나라와 국민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사람들은 1·2차 대전을 겪으며 호전적인 군부의 독주가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군에 대한 문민통제는 미국, 유럽 국가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문민통제는 국민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정치권력(대통령)과 민간인 관료(국방장관)가 안보 정책을 결정하고, 군은 군사작전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문민통제를 거론할 때 미국이 모범 사례로 꼽힌다. 미군은 태평양사령부, 유럽사령부 등 세계를 6개로 나눈 통합전투사령부의 사령관을 ‘최고사령관’(CINC·Commander-in-Chief)이라고 불렀다. 2002년 당시 국방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는 통합전투사령부 사령관에게 이 호칭을 금지했다. 최고사령관은 대통령에게만 붙일 수 있는 호칭이라 문민통제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이후 미군은 통합전투사령관을 최고사령관이 아니라 사령관(Commander)으로 불렀다.

미국에는 관련 법에 현역 군인은 전역하고 7년이 지나야 국방장관을 맡을 수 있다고 정해놓았다. 군복을 벗은 지 최소 7년은 지나야 군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역대 국방장관 중 이 규정의 예외는 1950년대 조지 마셜과 2017년 트럼프 행정부 때 제임스 매티스 2명뿐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8일(현지시각) 육군 4성 장군 출신인 로이드 오스틴을 국방장관에 지명했다. 오스틴이 미 상원 인준을 통과하면 미국 역사상 첫 흑인 국방장관이 된다. 2016년 전역한 오스틴이 국방장관이 되려면 상원이 ‘전역 7년 경과’ 조항의 면제를 승인해야 한다. 미 상원이 매티스에 이어 오스틴에게도 예외를 인정할지 궁금하다.

권혁철 논설위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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