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 ㅣ 사회학자
2020년이 저물어간다. 코로나19로 세계인이 함께 고통받은 한 해였다. 거창하게 세계인까지 들먹일 것도 없다. 지난해 가을의 대학 사직 후 맞은 첫해였으니 내게도 퍽 중요한 1년이었다.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고 했다. 악착같이 버티라는 경고다. 어떻게 되겠지 하고 그만뒀더니 코로나가 닥쳤다. 이 시국에 프리랜서라니! 선배들 말이 하나 틀린 게 없다. 행여 초심자들이 무턱대고 따라 하지 마시라고 지난 1년을 정리해본다.
대학 밖 연구자가 밥벌이를 의뢰할 길은 좁고 잡다하다. 공적 지원과 시장에서의 지식 판매 이외의 길을 딱히 찾기 어렵다. 공적 지원이라고는 해도 결국 한정된 재원을 둘러싸고 경쟁이 벌어지니 본질적으로 저잣거리의 세계다. 그나마 짧지 않은 경력 덕분인지 잡다하게 밥벌이를 얻었다.
우선 두세 군데에서 공적 지원을 받아서 강연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연구도 하고 있다. 두어 종류의 연구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코로나 탓에 강연이 뚝 끊겼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무소속 연구자에게 강연은 큰 먹거리인 탓이다. 코로나가 아예 장기화되자 온라인으로 강연이 재개됐다. 불러만 주시면 어디서든 강연을 한다. 설움도 있다. 아무리 무명이라도 그렇지 강연료를 알려주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일단 오케이 하지만 제발 그러지 마시라. 가격은 알고 팔리고 싶다. 원고료도 살뜰하다. 이 난의 칼럼을 매달 쓰고, 예전엔 모양새 있게 사양하곤 하던 원고 청탁도 넙죽넙죽 받는다. 10월부터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매주 10분짜리 지식 소개도 맡고 있다. 이렇게 늘어놓으니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만 시쳇말로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밥벌이가 된다는 말이다. 아무렴 모르고 시작한 일은 아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며 대학을 떠났지만, 저잣거리가 우아할 리가 없다.
한때 어느 유명인이 자임하면서 지식의 소매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겸양의 표현이겠지만 아카데미에 갇힌 지식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도 담겼다고 짐작한다. 감히 그 유명인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점방이라도 있는 소매상에 비하면 나는 날품팔이에 가깝다. 내일의 기약이 없으니 날마다 자기의 유용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휘발성의 나날을 버티게 해준 힘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왔다. 한가지 사례만 든다. 한 기관의 지원으로 매주 2개의 강좌를 5개월간 진행했다. 동네서점 강좌라 쉽게 가도 좋았을 텐데 욕심이 나서 빡빡한 프로그램이 됐다. 대학 교양강좌보다 심도가 깊어졌다. 진행 중 코로나 확산으로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그 참에 페이스북에 알렸더니 추가로 참가 희망자들이 생겼다. 그렇게 공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실시간 참가를 못 한다며 녹화를 요청하는 이들이 나왔다. 페이스북 그룹을 만든 다음 영상을 올렸더니 시간의 한계도 넘어섰다. 모두 어영부영 우발적으로 생긴 일이다.
‘코로나 시대 질병공부’라는 주제로 전염병에 대한 저작들을 읽고 토론한 강좌는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점점 밀도가 높아졌다. 어떤 참가자는 종종 해외의 최신 논의를 찾아서 알려주었고, 과학에 교양을 지닌 이는 공부를 밑천 삼아 지역신문에 전염병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같이 읽은 외국 저자가 기조발제를 맡은 온라인 국제회의에 함께 참가하는 기쁨도 누렸다. 다른 강좌에서는 ‘욕망과 행복의 경제학’을 주제로 화폐와 금융, 행복을 논했다. 화폐사 전공자가 참여해서 배우는 게 더 많았다. 경제생활 경험들이 풍부하니 돈 번 이야기, 잃은 이야기가 풍성했다. 돈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했다. 돈 버는 비결만 빼고 다 이야기한다며 투덜대며 웃었다. 수강생들이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들이라 내가 더 배웠다.
어떤 남자분은 종강 날 꽃다발을 보내왔다. 남자의 꽃다발은 처음인데 생각보다는 기분이 꽤 괜찮았다. 다음에는 돈이 좋겠다며 서로 웃었다. 종강파티에 와인 들고 오겠다던 서울 참가자는 코로나 탓에 못 왔다. 코로나 조기 종식으로 종강파티를! 또 다른 참가자는 방사해서 키우는 닭이 낳았다며 달걀 120개를 보내주었다. 돈이라면 뭣했을 텐데 달걀이라 고맙게 받아 이웃과 나누고 있다. 돈보다 달걀이다.
대학에서는 불가능했을 일들을 1년간 경험했다. 위태로운 시절을 아슬아슬 버텼지만, 그 덕에 랜선을 타고 뜻하지 않은 세상을 만났다. 나도 돈이 좋다. 꽃다발과 와인과 달걀은 더 좋다. 이렇게 영리에 영혼이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