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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당당한 무학력자들을 능력주의 사회로 보내며 / 이병곤

등록 2020-12-16 15:40수정 2020-12-17 13:52

이병곤ㅣ제천간디학교 교장

이번 주말 졸업 예정인 고3 아이들과 1시간가량 개별 면담을 했다. 업무 시간 짬짬이 틈을 내어 18명의 예비 졸업생들과 이야기 나누려니 꼬박 일주일이 걸린다.

“오엠아르(OMR) 카드에 답 쓰는 거 처음 해봤어요. 신기하더라고요.” 중학 과정 검정고시를 보았던 아이의 말이다. 아, 그렇구나. 대안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우리 학교 입학한 다음 검정고시를 하나도 안 치르고 졸업한다면 그 아이의 최종 학력은 ‘무학’이다. “생전 처음 그런 시험 치러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더 준비해서 고등학교 과정도 해볼 거예요.”

2019년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인 67.8%. 이런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확실한 비주류다. 우리 학교는 입학생을 뽑을 때부터 대학 입시와 관련된 그 어떤 준비나 도움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학부모들에게 강조한다. 진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설정한 교육과정 목표에 집중하고자 함이다. 고교 3학년 아이들은 1학기 4개월 동안 자신의 관심사와 연관된 기관이나 단체 등에서 인턴십을 한다. 2학기에는 스스로 공부한 주제를 중심으로 발표와 토론을 펼치는 1주일간의 ‘인문학 캠프’를 교외에서 기획·진행한다.

진정한 교육의 힘은 무엇을 과도하게 하는 것보다 과감하게 안 하는 데서 나온다. 의지를 발휘해서 무엇을 하는 것만큼 자기 판단 아래 무엇을 안 하는 것 역시 소중하다. 능력주의사회(meritocracy)를 향해 나아갈 아이들에게 말했다. “작년에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을 중간에 그만둔 자퇴생이 5만4천명이야. 그들의 애초 선택은 진정 누가 내린 것이었을까? 너는 이제부터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봐. 그것이 모여 참너를 만들어갈 거니까.”

“관계를 통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됐어요. 거기에 배울 게 다 들어 있던데요.” 학기 중에 기숙사 생활을 하므로 아이들은 24시간 친구와 선후배들과 붙어 지낸다. 정확히 말하면 ‘지지고 볶는다’. 성장기에 홀로 맞이하는 감정의 격랑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곁에 그런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첫 입학 직후 친소 관계에 따라 정서적 공감대의 진지를 쌓고, 그 과정에서 패가 여럿으로 나뉘어 갈등을 겪는다. 중학교 2학년이 지날 무렵이면 서로 안 싸우고 지내는 방법을 터득한다.

나를 들여다본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지금의 내가 형성되었는가. 내가 만났고, 나의 경험을 거쳐간, 또는 현재에도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결정(結晶)된 실체, 그것이 ‘나’인 것이다. 고 신영복 선생은 일찍이 ‘서도의 관계론’에서 이렇게 짚으셨다. “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됨으로써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졸업을 앞둔 아이들의 짧은 증언에서 비고츠키가 간파한 ‘고등정신기능의 기원’을 떠올린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자라면서 얻는 모든 지식, 개념, 실천적 기능들은 사회 속에서, 즉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각 개인은 사회적 상황에서 먼저 그것을 접촉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발달은 사회적 국면에서 개인적 국면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밟으며 진행된다. 사회적 관계로부터 개인 정신의 본질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내가 있다’고 설파했다면 비고츠키는 ‘내 밖에 나를 만든 수많은 내가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관계 맺는 힘을 키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직접 관계를 겪어보는 것이다. 현대 한국 교육의 비극은 청소년들에게서 그러한 관계 맺음의 기회와 시간을 박탈하고 있는 가정, 사회, 학교에서 시작한다.

졸업하는 친구들아. 다른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마음자리 내주는 일, 서로 협력해서 어떤 프로젝트를 완성해내는 일, 갈등하는 당사자들 다독거리면서 판이 깨지지 않도록 보살피는 일, 스스로 생각하기에 미안한 일 저질렀으면 먼저 사과하는 일들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그처럼 중요한 능력에는 이상하게 자격증이 없더라. 그러니 국가공인 학력 없다고 위축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당당하게 너희들 삶을 펼쳐나가렴.

“으음, 뭐 당장 이번 겨울에는 운전면허 ‘시험’부터 보려고요.” 아이들 열에 일곱은 졸업식 직후 하고픈 일이 이것이라 했다. 얘들아, 그 면허 시험보다 훨씬 어려울 인생 운전은 더 잘해주길 바라. 이미 너희들은 삶을 이끌고 갈 무형의 자격증 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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