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박ㅣ영어교육가·에세이스트
수잰 콜린스의 헝거게임 시리즈 3편 <모킹제이>에서 헝거게임의 이전 우승자인 피닉 오데어는 주인공 캣니스에게 “사람들은 네게 키스하고 싶어 하거나, 너를 죽이고 싶어 하거나, 네가 되고 싶어 할 거야”(They’ll either want to kiss you, kill you or be you)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만큼 공인 혹은 셀럽을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더 잘 나타내는 말을 본 적이 없다. 정치인이나 연예인 혹은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이런 심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키스 유와 킬 유는 사실 한 동전의 양면이다. 너무 좋아해서 따라다니는 ‘키스 유’의 마음은 조그마한 거절과 무시에도 당장 한쪽 극단에서 반대쪽 극단으로 한달음에 질주해서는 엄청난 증오를 내뿜는 ‘킬 유’가 된다.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팔랑 그 마음이 뒤집히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할 정도로 열렬한 숭배에서 무시무시한 증오로 표변한다.
사실 조그마한 거절과 무시에도 홱 돌아서는 이 마음은, 자신이 지지하고 좋아하는 공인이 어떤 과오를 저질러도 무작정 감싸고 드는 마음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그 과오가 내게 가해진 과오가 아니라면 다 감싸고 넘어가야 한다고 할 정도로 괜찮고, 내게 가해진 과오라면 그 순간 그렇게 좋아하던 이도 철천지원수가 되는 마음이 어떻게 다르다고 하겠나.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입장 사이에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 둘은 동일하다.
키스 유에서 킬 유로 돌변하는 일은 이런 일들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로 단번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밀리 바비 브라운은 최근 인스타에 한 동영상을 올리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팬 하나가 밀리를 찍어도 되냐고 물어서 “노”라고 대답했는데도 그 팬이 왜 찍지 못하게 하냐면서 입씨름을 벌인 일을 울면서 올렸기 때문이다. 이 건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밀리의 말처럼 한 사람의 경계(boundary)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의견과 유명인이라 치르는 유명세이니 그게 그렇게 싫으면 연기를 하지 말라는 의견으로. 원하지 않을 때 찍히고 싶지 않다는 이 작은 제스처 하나로 밀리에게 ‘키스’하던 많은 이들이 ‘킬 유’로 돌아섰다.
좋아하는 스타이니 카메라를 들이대면 순순히 찍혀주어야 한다는 생각, 찍으려고 할 때 거절당하면 분노하는 마음, 유명해져서 잘 먹고 잘사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 이게 다 키스 유, 킬 유의 심리들이다. ‘내가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는 감히 어마어마하게 너를 좋아하는 나를 거절하는 거니까, 이제부터 너를 죽일 듯이 미워해주겠어.’ 딱 이렇다. 이건 굉장히 유아적인 집착이지, 사랑이 아니다. 유아들의 세상엔 자신밖에 없는데, 그 거대한 자신을 타인에게 전적으로 기대고 타인만 바라보는 그런 세상이다.
여기에 ‘비 유’를 이해하면 이제 ‘키스 유, 킬 유’가 온전히 이해가 된다. ‘비 유’는 ‘네가 되고 싶어’(want to be you)라는 욕망이다. ‘키스 유, 킬 유’의 기저에는 이 마음이 숨어 있다. 너를 사랑하는 것도 네가 되고 싶어서, 너를 미워하는 것도 네가 되고 싶어서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빛나는 대상을 보며 숭배하는 마음이 독이 되는 것은, 원하면 원할수록 대상과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간극을 해소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키스 유도 킬 유도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을 바라보며 이런 마음이 어느 정도 있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바라보는 대상과 나 사이의 간극, 네가 되고 싶으나 네가 될 수 없는 좌절된 욕망을 앞에 두고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사람의 성숙도는 갈린다.
나는 절대 네가 될 수 없다. 타인을 바라보는 눈길을 거두고, 간극을 스스로 갈무리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얼마나 사랑하든, 누구를 얼마나 많이 죽이든, 자신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살릴 수 없다. 타인에게 의존하는 마음은 누구를 죽일 힘은 있어도, 그 누구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살릴 힘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