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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누가 ‘능력주의’를 미화했는가 / 김만권

등록 2020-12-20 17:07수정 2020-12-21 02:42

김만권 ㅣ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능력주의’. 2020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말 중 하나다. ‘메리토크라시’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든 이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다. 1958년에 발간된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이 표현을 처음 썼다. 여기서 영은 이렇게 묻는다. 하층계급과 상층계급을 가르는 심연이 더욱 넓어지는데도 왜 사회는 이토록 안정을 유지하는가?’ 영의 대답은 명쾌하다. 능력에 따라 계층이 갈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가치 아래 만들어진 불평등이기에 사회가 안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개인의 실패는 온전히 각자의 능력이 모자란 탓이기에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탓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앞에 영은 이렇게 되묻는다.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누군가가 능력이 덜하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왜 그것이 재화와 권력을 적게 할당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가? 이런 영의 문제 제기는 일리가 있다. 민주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이 엘리트들의 능력보다 뛰어나서 정당성을 획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플라톤 시대부터 엘리트들이 경멸해 마지않던 체제였다. 그런데 왜 민주사회에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조차, 능력에 따라 자원과 권력을 할당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영에 따르면, 능력주의란 평등을 받아들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골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불평등이라는 모순을 비켜가기 위해,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정당하다 혹은 제한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영은 이런 능력주의가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계층 사이에 높은 벽이 만들어져 오히려 계층이동이 가로막힌다고 말한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아니 능력주의가 사회적 계층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로막는다고?’ 우리는 능력주의를 불평등의 해결책처럼 말하고 있지만, 영이 애초에 이 용어를 만들었던 의도는 능력주의가 불평등의 또 다른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예일대 로스쿨의 대니얼 마코비츠 역시 <능력주의의 함정>(2019)에서, 당대의 불평등은 능력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면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마코비츠는 1950~60년대 서구사회에서 능력주의 혁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바로 엘리트 계급이 자식에게 신분과 재산 대신 능력을 만들어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소득의 세습이라는 전통적 요소에 주목하고 있다면, 마코비츠는 자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능력의 세습이라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 능력주의의 엘리트들은 인생에서 오랜 기간의 교육을 거친다. 마코비츠는 미국을 건설한 이들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이를 35살로 규정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오늘날 엘리트들은 35살에도 학교 교육을 받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한다. 자신이 예일대에서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앞으로 엘리트로 살려면 박사학위가 적어도 2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다. 당장 우리만 봐도 3~4세에 엘리트 교육이 시작되고 한글도 모르는 5~6살 아이들이 영어 글쓰기를 시작한다. 엘리트 부모들은 자산을 아이들의 교육에 쏟아붓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가용한 모든 자원을 최대한 동원해 아이들에게 능력을 ‘만들어서’ 물려준다. 마코비츠는 이런 능력을 상속받는 세대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늘 긴장하고 지쳐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교육을 받고 있음에도 자신감에 넘치기보다는 주눅 들고 불안과 불신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멈추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무엇보다 영과 마코비츠는 노력주의로 변신한 능력주의가 사회의 다수를 능력이 없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자들로 만들어, 사회에서 무엇인가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로 전락시킨다는 점을 우려한다. 무엇보다 양극화 시대의 능력주의는 사회적 다수를 능력 없는 자들로 만들어 무기력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때로 도덕적 수치심을 안긴다. 이런 점에서 2001년, 토니 블레어가 능력주의를 찬양했을 때 <가디언>에 실린 영의 반응은 의미심장하다. ‘비판의 의미로 만든 이 용어가 찬사의 말로 쓰이고 있다는 점은 실망스럽다.’ 그렇다. 능력도 세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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