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영ㅣ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책 <분배정치의 시대>의 한 대목이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판잣집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주거권 워크숍이 열렸다. 주거권의 역사와 필요성에 대해 열띤 강연이 이어졌는데, 피곤한 기색으로 한참을 듣던 노인이 손을 들었다. “오늘 들은 얘기는 내가 집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거고, 그 점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집에 대한 권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 사이 그가 말을 덧붙였다. “나는 집을 원합니다.”
모두가 적절한 주거생활을 누릴 권리는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헌법이나 주택법에서 근거를 찾는 게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불안정 주거 상태를 전전하다 보니 ‘권리’라는 언어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코로나19가 닥치면서 불안정 주거를 끝장내야 한다는 논의가 일보 진전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불편한 상상이긴 하지만, 집에서 온전히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 초래할 감염 위험 때문에라도 주택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빈곤이 경제발전과 안정을 위협하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고 수정해온 게 자본주의 사회보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실제 주거 빈곤에 처한 사람들은 집 바깥으로 발을 내디뎌야 취약한 삶을 그나마 견딜 수 있다. 다세대주택 단지의 골목길이나 정자는 좁은 방에 갇힌 노인들에게 또 다른 집이다. 불법으로 쪼갠 원룸이나 고시원에 살면서 남의 샤워 소리, 키보드 소리, 코 고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청년들에게 카페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폭염과 추위에 고스란히 노출된 쪽방 주민이나 홈리스는 공공시설을 ‘사유화’하는 게 생존의 방책이 되었다. 코로나 상황에서 집에만 있으라는 요구에 화답하기 힘든 이들은 감염에 취약할 뿐 아니라, 감염을 확산시킬 수도 있다. 앞으로 정체불명의 역병이 더 자주 찾아든다면, 모두에게 살 만한 집을 보장하는 게 최고의 방역이지 않을까.
하지만 부동산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보면 가난한 사람을 ‘위험’으로 들이대는 불온한 생각마저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욕망 바이러스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독한 걸까. “집을 원합니다”를 재산 증식의 의지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외려 많아졌다. 공공임대주택을 늘리는 방안에 대해 “너나 사세요”라며 조롱하고, 주택이 화수분 역할을 했던 산업화 세대의 축복을 왜 자신들은 누려선 안 되냐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집의 바람은, 재건축 규제를 풀고 저금리 시대에 자산화 가능한 주택을 늘리라는 외침 앞에 너무나 무기력해졌다.
집값에 대한 공포와 욕망이 뒤엉킨 난장에서 홀로 외유하기는 확실히 어렵다. 내 마음도 덩달아 출렁거린다. 몇 년 전 대출을 받아 경기도의 오래된 소형 아파트를 구매했을 때, 들뜬 마음에 원주인과 부동산 중개인, 위아래 옆집까지 선물을 돌렸다. 일한 것도 없이 집값이 뛰었지만, 서울의 오름폭과는 천양지차다. 우리 동네가 그래도 살기는 최고라며 애써 점잖은 척하다가도 “인서울”을 은근히 자랑하며 “다행이다”를 연발하는 사람을 만나면 억하심정이 든다. 집 없는 사람들, 치솟는 전셋값에 절망하는 사람들은 어느새 관심 밖이다.
그래서 나의 비루한 욕망을 국가가 과감한 제도 개혁을 통해 무너뜨려주길 바랐다. 국가와 자본은 보통은 공생하지만, 때로 엇박자를 보이기도 하지 않던가. 투기를 부추기는 다주택자의 주택 매입을 근절하고, 토지는 원래부터 모두의 것이라는 공유부 개념을 보유세 인상으로 실현해주길 바랐다. 공공주택 확대 등 중대한 진전이 없지 않으나 여전히 대혼란이다. ‘세금 인상 폭탄을 맞은 서울의 중산층 연금생활자’를 국민의 표준으로 등장시킨 보수 언론의 춤사위가 살벌한 탓일까? 정부의 공공임대 최저주거기준은 10년째 변한 게 없고, 용적률을 늘리고 자투리땅을 뒤져서라도 공급 물량을 늘리겠다는 의지가 ‘살 만한’ 주거에 대한 논의를 압도한 형국이니 남 탓만 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기대를 쉬이 접긴 힘들다. 주거권을 재산권으로 퉁치는 작당이 곳곳에서 횡행하다 보니 다시 한번 정부에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집을 원한다”는, 불안정 주거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간절함에 분명히 응답해주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