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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삐라의 품격, 삐라는 아무나 뿌리나? / 권혁철

등록 2020-12-31 17:20수정 2021-01-01 02:40

2020년 6월22일 밤 경기 파주에서 탈북민단체가 보낸 대북전단 풍선이 다음날인 6월23일 강원 홍천군 서면 마곡리 인근 야산에 떨어져 경찰이 수거하고 있다. 대북전단법에 반대하는 미국 사람 중에서도 일부는 대북전단이 휴전선 근처에 떨어져 북한 내부에 닿지 않기 때문에 전단이 효과적인 정보 유입 방법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연합뉴스
2020년 6월22일 밤 경기 파주에서 탈북민단체가 보낸 대북전단 풍선이 다음날인 6월23일 강원 홍천군 서면 마곡리 인근 야산에 떨어져 경찰이 수거하고 있다. 대북전단법에 반대하는 미국 사람 중에서도 일부는 대북전단이 휴전선 근처에 떨어져 북한 내부에 닿지 않기 때문에 전단이 효과적인 정보 유입 방법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연합뉴스

권혁철 ㅣ 논설위원

삐라(전단)에 무슨 품격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나는 삐라에도 최소한의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해 첫날부터 뜬금없이 삐라의 품격을 꺼낸 것은 대북전단법을 둘러싼 국내외 논란 때문이다. 대북전단법을 두고 일부 미국 의원 등이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펴는 미국 사람에게 ‘실제 삐라를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고 싶다.

지난해 논란이 된 삐라 내용을 보자. ‘인간 백정 김정은’, ‘핵 미치광 김정은 놈 때려부셔요’, ‘김정은을 특수강간 미성년 성폭행죄로 고발한다’ 등등.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김정은 위원장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도 삐라에 등장한다고 한다. 지난해 6월 북한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했을 때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북전단에 김 위원장의 부인 리설주를 합성한 외설적인 사진이 실렸기 때문”이란 분석을 내놓았다.

탈북민이나 남북관계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식의 삐라는 북한 주민을 설득하기는커녕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삐라는 심리전의 대표적인 수단인데, 지난해 탈북민 단체가 뿌린 삐라는 심리전의 기본 요건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 심리전은 한국전쟁을 통해 미군의 심리전 이론과 경험을 받아들여 발전하기 시작했다. 미군 심리전 지침을 보면 거만하고 복잡하고 추잡한 언동은 듣는 사람이 등을 돌릴 테니 삼가야 한다고 돼 있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은 전쟁포로를 상대로 정보를 수집할 때 지도자, 조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았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첩보요원으로 참전한 폴 라인바거는 저서 <심리전이란 무엇인가>에서 적군의 투항을 회유할 때 “군인의 충성심과 정면으로 충돌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충성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살아야 충성도 할 수 있으니 투항하시오’란 식이다.

미국 내 논의를 살펴보면, 삐라가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폐쇄 사회에서 사는 북한 주민의 알 권리 보장 차원에서 막아선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대북전단법에 반대하는 미국 사람 중에서도 일부는 삐라가 효과적인 정보 유입 방법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지난 22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누리집에 올린 글에서 ‘삐라가 휴전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 북한 내부에 닿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탈북민을 인터뷰한 미국 국제정보기구(ITC)의 연구에서도 북한 주민들이 대외정보를 얻는 주요 원천이 삐라가 아님을 암시한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 예산을 받아 북한인권단체를 지원하는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의 칼 거슈먼 회장은 지난해 6월 언론 인터뷰에서 “(대북전단이) 아주 효과적인 대북 정보유입 방법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더 효과적이고, 정교하게 북한 주민들에게 접근하는 방법들이 있다”고 말했다. 외부 정보가 북한에 들어가는 주요 창구는 북한-중국 국경으로 알려져 있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남북은 수십년간 삐라를 주고받았다. 우리 정부는 1980년대까지는 ‘김일성의 민족반역적 죄상 폭로’ 등 남북 체제대결 승리를 위한 대북 심리전략을 폈다. 우리 국력이 북한을 월등히 앞서면서 1990년대 이후 대북 심리전략은 풍족한 한국 현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2000년 이후 남북 화해협력이 본격화되면서 정부 대신 민간이 삐라 살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탈북민 단체의 삐라에는 북한 최고지도자를 비난하는 내용이 담겼다. 대북 심리전략 측면에서 봐도 시대착오적이고 품격 없는 이런 삐라가 왜 다시 등장했을까. 나는 이 삐라가 북한 주민들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라 탈북민 단체 후원금을 내는 국내외 보수층의 주머니를 겨냥했을 것이란 ‘합리적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2차대전 때 미국이 체득한 심리전의 원칙 중 하나가 ‘심리전은 사령부의 기능’이다. 이 말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전단을 유포할지 계획이 없는 민간인은 지상과 공중을 막론하고 전단을 작성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삐라는 아무나 뿌리는 게 아니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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