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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지상의 달팽이집 한칸 / 조형근

등록 2021-02-07 15:58수정 2021-02-08 09:35

더듬이 끝에 달린 눈에, 달리는 버스가 보이기는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달팽이 한 마리가 서울 명동 도롯가를 기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더듬이 끝에 달린 눈에, 달리는 버스가 보이기는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달팽이 한 마리가 서울 명동 도롯가를 기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형근 | 사회학자

스무살까지 딱 스무번 이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토끼띠라 한곳에 머물 팔자가 못 된다고 체념하듯 푸념했다. 토끼띠답게 이사 때도 아버지는 부재했다. 이사는 어머니와 세 아들 몫이어서 짐 싸는 데는 제법 이골이 났다. 트럭 용달을 하는 이모부가 힘이 됐다. 짐칸에 앉아 흔들리면 좋은 집보다 한집에 살고 싶었다. 다행히 내 대입 시험 뒤 이사한 집에서 두분은 20년을 사셨다. 주인 잘 만난 복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하숙과 자취를 전전하면서 결혼 전까지 딱 열번, 서른살에 서른번을 채웠다. 토끼띠도 아닌데 늘 사정이 생겼다. 서른한번째 이사로 신혼집에 들어가면서 소망했다. 단 몇년이라도 이사 안 가고 살면 좋겠다고.

그 집에서 8년을 살며 소망을 이뤘다. 변두리 달동네, 꼭대기 집 꼭대기 층, 위로는 집이 없고 절간 한채만 있었다. 산이 시작되고 하늘이 가까웠다. 옥상에서는 63빌딩이 보였고, 멀리 비행기 사라지는 구로공단, 김포공항 쪽이 노을에 아른거렸다. 어느 저녁에는 케이비에스(KBS)팀이 옥상에서 노을을 찍어 갔다. 티브이에서 노을을 보면 반가웠다.

8.5평 집에서 행복했다. 자취 살림을 합쳤지만 그래도 신혼이라고 동네 가구점에서 화장대, 장롱, 식탁, 의자를 20만원에 마련했다. 식탁이 생겨 기뻤다. 20만원짜리 중고 냉장고는 넉넉했다. 3만원에 산 원목 합판을 책상으로 삼았다. 부모님 선물은 새 이불. 이게 혼수 전부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에는 리어카 하나에 다 실리던 작가의 신혼살림 이야기가 나온다. 얼추 비슷했다. 그 작은 집에서 종종 친구들과 밤새 놀았다. 괜찮다던 아래층 어른들이 고마웠다. 겨울에 눈 오면 찻길이 끊기니 주민들이 함께 눈을 치웠다. 끝나면 막걸리 몇잔 나누곤 했다.

산동네라 주차가 큰 골치였다. 원주민 몇몇이 구청 땅인 산 입구 공터에 기둥 박고 체인 둘러 자기들만 주차장으로 썼다. 신참 주민이 어느 밤 체인을 자르겠다며 커터 들고 날뛰었다. 고참들의 욕설이, 주민들의 참견이 질펀했다. 그 후로도 오래 싸웠다. 어느 심야에는 와장창 소리에 나가 보니 절집의 비구니 주지가 절간 거사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술 취한 거사가 새벽에 돌아와 대문을 걷어찼나 보다. 비구니는 상욕도 하다가 “박복한 이년 팔자가 서럽다”며 울다가 웃다가 했다. 우리는 그녀의 인생사를 경청했다. 다음날 거사는 태연히 일했고, 비구니는 염불에 여념이 없었다. 둘은 가끔 와장창하며 그럭저럭 살았다. 시주는 못 해도 인사는 하며 지냈다.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다만 사람이 살았다.

8년 살고 이사 나가는데 알겠다던 주인이 연락이 끊겼다. 내용증명에도 답이 없었다. 집주인도 서민이었다. 우리 집이 신혼집이던, 전세금 한번 올리지 않은, 가끔 술도 사주던 좋은 이였다. 호형호제했다. 사업이 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전세금은 구청이 경매를 걸어 10년 뒤에 받았다. 나올 때 고생했지만 고마웠다. 토끼 같던 내 인생에 달팽이집처럼 오래간 집이었다. 거기서 이웃이, 삶이 생겼다.

집값 폭등에 정부가 특단의 공급대책을 내놨다. 공공이 주도하되 70~80%는 분양해서 내 집 마련의 꿈 실현은 물론 기존 대비 10~30%포인트 높은 수익률도 보장한단다. 이참에 도심 규제도 대거 푼다고. 공공임대나 사회주택 같은 주거 공공성 비전은 힘을 잃었다. 중산층 자산 만들어주기에 올인하는 모양새다. 민간자본의 협력도 얻는다는데 이윤을 꽤 보장해야 할 것이다. ‘돈 되는 집’ 패러다임이다. 광역시에도 공급한다지만 키워드는 결국 서울 도심에 공급 폭탄, 균형발전은 물 건너갔다. 유동성 과잉시대라 불가항력인가도 싶고, 소신 없는 정권의 한계인가도 싶다.

작년에는 국민의 15.1%가 이사해서 2015년 이후 최고였다. 한국의 인구이동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달팽이집 한채가 없으니 서민들 삶이 토끼처럼 숨차다. 우리 집 옆에는 전국 최대의 행복주택이 있다. 대기순번 받고 기다리는 사연들이 구슬프다. 내 젊은 날의 달팽이집은 재개발도 안 되는 달동네, 좋은 집주인 덕이었다. 주인이 망하니 도루묵이었다. 좋은 집주인 대신 공공이 역할을 해야 할 텐데 돈 되는 집에 힘을 쏟겠다니 서글프다. 문득 옛 주인에게 전하고 싶다. 고마웠다고, 원망한 적 없다고. 지상의 집 한칸이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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