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을 이끌어가는 리더를 따를 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리더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자유 일부 또는 전부를 담보 잡힌다는 뜻이다. 자유를 담보 잡힌 개인들은, 바로 그 ‘결여’로 인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한 행동이 특정한 상황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되면 ‘집단적 방종’이 된다.
김용석 ㅣ 철학자
1930년대 후반,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각자 자기 나라의 강력한 통치자였다. 둘은 동맹을 맺고 개인적으로도 ‘우정’을 과시했다. 1933년에 집권한 히틀러는 짧은 시간에 전체주의 국가의 기틀을 닦았고 지도자로서 위상을 확고히 했으며 큰 전쟁을 치를 군사력도 갖추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초청해 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베를린 광장에 수많은 사람을 동원해서 그를 환영했다. 환영사 끝에 히틀러는 권총을 빼 들고 소리쳤다. “독일 국민이여, 내가 이 총을 그대들에게 던질 것이다. 제일 먼저 이를 받은 자에게 ‘위대한 제국과 영도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를 주겠다.” 총은 군중을 향해 날아갔고, 그들은 먼저 총을 잡으려고 서로 치고받았다. 드디어 한 사람이 총을 집어 들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는 자기 머리에 총을 발사했다.
무솔리니는 경악했다. 자기 나라에 돌아간 후 히틀러의 답방 때까지 매일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은 히틀러보다 훨씬 앞선 1922년에 집권했는데도 이룬 것이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히틀러에게 뭔가 보여줘야 했다. 드디어 히틀러가 로마를 방문했다.
역시 광장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무솔리니가 신뢰하는 파시스트 청년 당원들도 있었다. 모두 고대 로마 병사의 칼을 상징하는 단검을 차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깃털을 빼 들고 소리쳤다. “로마 제국의 정기를 받은 청년들이여, 내가 이 깃털을 그대들에게 던질 것이다. 이를 제일 먼저 잡은 자에게 조국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단검으로 목숨을 바칠 기회를 주겠다.”
깃털은 폴폴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 청년의 머리 위에 도달했을 때다! 그는 자기 코끝에 닿을 듯 날아온 깃털을 훅 불어버렸다. 깃털은 옆 사람에게 날아갔다. 그 역시 깃털을 훅 불었다. 광장의 사람들은 자기 앞으로 깃털이 날아올 때마다 훅, 훅, 훅 불어서 쫓아냈다. 깃털은 사람들 사이로 계속 떠다녔고, 지금도 떠다니고 있다.
이는 물론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이는 당시 두 나라의 전체주의화가 각각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은 각자 자기 나라에서 ‘지도자 또는 영도자’였으며, 각자 자기 나라말로 그렇게 불렸다. 무솔리니는 ‘두체’(Duce), 히틀러는 ‘퓌러’(Führer)라고 불렸으며 이 호칭은 공식 직함으로도 사용되었다. 둘 다 영어의 ‘리더’(leader)로 직역될 수 있는 말이다.
오늘날 리더라는 말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외래어다. ‘리더십’(leadership)이라는 단어도 폭넓게 국제화되었다. 그 개념에 대한 저술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인류 정치사에서 리더라는 말은 오랫동안, 즉 19세기 이전까지 특별한 의미로 쓰이지 않았고 특별히 개념화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까지 대부분 국가의 위정자는 당연히 나라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리더, 곧 왕 또는 군주였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시민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고 국가의 주인으로서 위정자를 선출한다. 누군가에게 이끌려 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을 감시해야 한다. 그런데도 지난 2세기 동안 민주주의의 전지구적 확산과 동시에 국민을 이끄는 지도자에 대한 욕구는 그치지 않고 있다. 모순 아닌가. 그렇다.
이런 모순 속에서 국가 통치자들의 자질과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서 도입된 개념이 리더십이다. 과거에는 부각되지 않았던 언어가 새로운 정치적 상황에서 오히려 본격적인 개념화 작업을 거치면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또한 인류의 민주주의가 아직 시험 단계에 있음을 방증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극단적인 예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나치즘과 파시즘의 ‘유산’은 아직 세계 곳곳에 잠재하며 언제 또 어떤 변이를 일으키며 부활할지 모른다. 어떤 변이를 일으키더라도 ‘리더십에의 유혹’은 여전히 독재 또는 전체주의 국가 생성의 기본 동인이 될 것이다.
일찍이 500여년 전에 마키아벨리는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화정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지도자에게 예속되기를 바라는 성향이 있음을 간파한 바 있다. 지도자에 예속된다는 것은 그들끼리는 결속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단행동으로 국가를 전복하기도 한다. 자신들을 이끌어 가는 리더를 따를 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리더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자유 일부 또는 전부를 담보 잡힌다는 뜻이다. 그것이 선의든 악의든 중요하지 않다. 자유를 담보 잡힌 개인들은, 바로 그 ‘결여’로 인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한 행동이 특정한 상황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되면 ‘집단적 방종’이 된다.
우리는 아주 최근에 민주주의가 최고로 발달했다는 나라에서도 이에 관한 생생한 사례를 목격했다. 직전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 나서기 훨씬 전부터 정치인들에게 ‘강력한 리더십’을 촉구해왔다. 대통령이 돼서는 이른바 ‘터프 가이 리더십’을 호기 넘치게 연출했다. 당연히 강력한 리더들의 전용 구호인 ‘위대함’을 내세웠다. “매가”(MAGA), 즉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는 특별하지 않았지만, 그 반복적인 평범함 때문에 오히려 많은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트럼프의 행적은 별다른 게 없어 보인다. 그의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평가는 깊고 넓게 공과를 따지며 이루어져야 한다. 대선의 패자가 된 그를 지금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경솔하다.
다만 한 가지, 그의 리더십이 저지른 분명한 잘못에 대해서는 지금 바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자신이 열렬 지지자들의 자유를 담보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당연히 지도자에게 예속된 그들끼리는 결속했고 의기투합했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인간은 자유 없이 살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대리 분출이 필요하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국회의사당을 폭거로 점령하는 집단 방종을 저질렀다. 더구나 트럼프는 어리석게도 이들의 행동을 부추기는 발언을 했고, 아차 싶었을 때 비굴한 태도로 자기 지지자들을 비난하는 형식을 취한 변명 연설을 했다. 그는 리더십이 예리한 양날의 칼임을 잊고 있었다.
리더십이란 말은 근사하고 매혹적이며 ‘정치인들의 아편’ 같은 것이다. 현대 정치에는 민중을 이끌고 가는 지도자가 아니라, 다양한 갈등을 조정하고 소통하는 ‘조정자’ 역할이 중요하다. 이를 역설해도 ‘기득권 언어’에 중독되어 있으면, 안타깝지만 정치적 인식의 관점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