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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한민의 탈인간] 참 좋겠구나, 안 급해서

등록 2021-02-14 14:07수정 2021-02-15 02:38

김한민 ㅣ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십여년 전 서울 광화문을 지나고 있었다. 역사박물관 앞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노조 깃발들이 나부끼는 가운데 무대에 선 시인 송경동이 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떠밀어 죽이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져 죽어가니/ 너희는 참 좋겠구나 (…) 평생을 길거리에서 싸워가며 눈물바다/ 급기야 저절로 목숨까지 반납하며 눈물바다/ 짜디짠 눈물바다뿐인/ 노동자들이/ 다 죽는 세상이 참 좋겠구나”.

파블로 네루다가 모스크바에서 낭송을 할 때 스페인어 한마디 모르는 러시아인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확인 안 된) 일화가 떠올랐다. 그날 광화문 행인 중엔 눈물은커녕 눈길 한번 주는 이 없었다. 나 역시 약속을 핑계로 길을 재촉했고, 송경동의 우렁차다 못해 찢어질 듯한 절규도 멀어졌다. 그러나 “너희는 좋겠구나”란 후렴구는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요즘도 종종 생각난다. 특히 나에게 절박한 일이 남에겐 절박하지 않음을 느낄 때면.

언젠가부터 내겐 촉박한 사안이 많아졌다. 21세기에 인권, 노동권, 성평등, 동물권, 환경정의 등을 대놓고 반대할 사람은 적지만, 각각의 시급성에 대한 시각차는 천양지차다. 시간을 끌수록 또 하나의 생명 혹은 희망이 죽어 나가는데도 우선순위와 사회적 합의를 방패막이 삼으며, ‘변화란 그렇게 조급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가르치기에만 ‘바쁜’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졸지에 조급한 사람 낙인이 찍힐 때마다 그 시구가 떠오른다. 너희는 참 좋겠구나!

변화의 큰 방향에 동의하긴 쉽다. 문제는 변화의 속도다. 철학자 폴 비릴리오의 표현처럼 “속도를 정치화”하려 할 때 종종 맞닥뜨리는 역설은, 정말로 가장 급한 문제가 뭔지 알려면 가장 장기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군인이라고 치자.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시한폭탄 그리고 지뢰, 두 종류가 있다. 뭘 먼저 제거하겠는가? 당연히 전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 폭탄이 지휘관의 전역 후에 터질 예정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공동체의 미래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리더가 아니라면 폭탄 해체는 후임에게 떠넘길 공산이 크다. 그렇다, 나는 지금 기후위기를 말하고 있다. 정치적·물리적 수명이 곧 다할 (대부분의) 현 권력자들에게 기후를 맡기는 건, 그래서 극히 위험하다. 그들의 기후에 관한 약속은 말뿐일 가능성이 농후해 진정성을 확인할 지표는 속도뿐이다.

지난해 11월 국회 철문에 몸을 결박한 시위 끝에 연행된 기후 활동가들의 비판 초점이 바로 정부의 늑장 대응, 즉, 속도였다. ‘2050 탄소 중립’이라는 선언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리려고 몸을 던진 “멸종 저항”이라는 시민불복종 운동이었다. 영국을 비롯해 전세계 수십만명이 참여하고 수천명이 연행됐는데, 한국은 이 열한명이 전부였다. 이 청년들이 나선 이유는 명확했다. 단기 목표와 구체적 이행 계획 없는 30년 후의 약속은 달성 의지가 없음을 드러낸다는 것. 벌써 업계는 물론 정부 내부에서도 들리는 ‘속도조절론’은 이 의심을 더욱 합리화한다.

“선언을 한 게 어디냐. 좋은 쪽을 봐라. 급할수록 둘러가라” 부류의 충고라면 이제 그만. 김진숙의 36년째 투쟁에 송경동이 목숨을 건 단식으로 ‘지금이 아니면 죽음’이란 패를 던진 것 역시 조급함으로 해석하는 사람, 단순한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동일시하는 사람에겐 ‘안 하는 것보다 나은’ 시늉들도 진일보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한폭탄들의 실체를 알면 알수록 그런 정도의 속도는 한가하다 못해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사생결단한 시인, 감옥행도 불사하는 활동가들. 이들이 자주 접하는 의문 섞인 시선이 있을 것이다. “취지는 좋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는. 생각해보면 진짜 의문의 대상은 그렇게까지 (급)하지 않는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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