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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격화되는 이념갈등, 어떻게 볼 것인가 / 신진욱

등록 2021-03-02 13:57수정 2021-03-03 02:44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좌파 정권’. 문재인 정권의 반대자들은 줄곧 이 명칭을 사용해왔다. 태극기집회 전단지만이 아니다. 야당 정치인과 보수 언론이 다 그러하다. 방역이든 복지든 정부정책에 ‘이적 행위’, ‘공산주의’, ‘사회주의적 발상’ 등 이념 공세가 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념의 정치가 아니라 이념적 낙인의 정치일 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시민들의 이념갈등은 그보다 훨씬 깊고 진지한 문제다.

이념갈등은 2000년대 내내 심화되어 왔다. 국내 19개 중앙일간지에 ‘이념갈등’을 다룬 기사가 1990년대에 총 186건에 불과했는데 2000년부터 2020년까지 2210건에 달했다. 그 전환점은 참여정부 첫해인 2003년이다. 보수 일색 정치권에 개혁파가 등장한 것이 갈등의 시작이니, 이것은 겪어야 하는 진통이다.

오늘날 시민들도 이념갈등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2019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한국 사회에 갈등이 가장 심각한 분야로 응답자의 43.9%가 계층갈등을, 29.0%가 이념갈등을 꼽았다. 세대갈등(6.1%)이나 남북갈등(5.6%)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사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념갈등은 언제나 있었다. 해방정국과 반독재 투쟁의 시대를 이념갈등 없이 논할 수 있겠는가? 지금 새로운 것은 이념갈등 자체가 아니라, 이념갈등의 일반화, 일상화, 정치화다. 즉 이제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이념’이 치열한 다툼의 원천이자 정치를 규정하는 힘이 되고 있다.

첫째, 이념갈등은 많은 평범한 시민들의 문제로 일반화되었다. 독재 시대에 지배층은 국민들이 자기 이념을 형성하고 추구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념대결은 정권과 소수 저항세력에 국한됐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이 우리 사회의 문제와 대안에 대해 나름의 관점을 확립하고 이를 열렬히 주창하고 있다.

최근 여러 연구에서 시민들은 스스로를 진보나 보수로 평가하는 주관적 이념, 그리고 대북·경제·복지·젠더 등 쟁점에 대한 입장과 같은 여러 면에서 과거보다 일관된 이념 성향을 보이고 있다. 진보파는 기업과 부자의 지배를 비판하고 노동 보호와 분배정의를 중시하는 반면, 보수파는 민주화운동 세력과 개혁적 시민단체, 노조를 비판하고 기업활동의 자유와 개인의 성과를 중시한다.

둘째,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일상 공간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념 때문에 부모자식이 다투고, 연인이 헤어지며, 오랜 우정이 깨어진다. 명절날 ‘보수, 진보’ 얘기가 나오면 틀림없이 언성이 올라가고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는 소통의 한계를 절감하며, 이해의 장벽에 부딪힌다.

왜 그럴까? 이념은 단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상상이자 믿음이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현대사회에서 각기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갈등이 마치 ‘신들의 전쟁’처럼 격화된다고 했다. 우리는 그 가치가 부정당할 때 분노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말하자면 이념갈등은 곧 신념들의 투쟁이다. 그것은 손쉽게 봉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셋째, 시민들의 이념갈등은 정치의 유권자 기반과 여론 환경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념갈등이 정치 균열의 축으로 등장한 것은 최근 현상이다. 민주화 직후엔 안보 이슈가, 그다음엔 출신 지역이, 그다음엔 세대가 선거정치의 주요 변수였다. 그런데 이제 이념이 새로운 힘으로 부상하고 있다.

일례로 배진석 교수의 최근 연구를 보면 이념 성향은 정당 지지에 큰 영향을 미쳐서, 양대 정당의 지지층은 상당히 선명한 이념 성향을 나타냈다. 필자가 김희강, 박선경 교수와 수행한 연구에선 이념 성향은 국가 인식과도 관련된다. 진보 성향일수록 노동 보호, 불평등 완화, 돌봄과 건강을 위한 국가 역할을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핵심 균열인 이념갈등이 지금 한국 사회에 확대, 심화되고 있다. 이 현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우리는 이념 자체를 위험시하거나 이념갈등은 나쁜 것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념이 없는 사회는 정신이 죽은 사회며, 이념갈등이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다.

지금 한국 사회 문제는 이념갈등이 심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이념대결이 없다는 것이다. 정적끼리 이념공방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저변의 신념의 전쟁을 정치로 승화하는 것,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성평등과 지속가능성이라는 시대의 화두를 놓고 대안을 겨루는 것, 그것이 진짜 이념대결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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