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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함께 해서 즐거운 인생 / 조형근

등록 2021-03-07 17:08수정 2021-03-08 02:39

조형근 ㅣ 사회학자

살다 보면 가끔 벼락같은 축복의 순간이 온다. 갓 박사학위 받고 학교에서 일하던 무렵 어느 날의 점심때가 그랬다. “선배, 기타 치는 거 좋아하잖아요? 같이 밴드 해요.” 혼밥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보니 박사과정 여학생 두명이었다. “저는 드럼 배우려고요. 얘는 베이스 배우겠대요.” “○○ 선배는 기타, △△ 선배는 키보드 치니까 멤버가 돼요. 같이 해요.”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대학원생 후배들과 밴드를 시작했다. 5인조 혼성 록밴드 ‘조박사만 즐거운 인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밴드는 즐겁고 힘들었다. 선배 대접으로 리드 기타를 맡은 나는 모자라는 실력 탓에 툭하면 틀려서 김을 뺐다. 그래도 좋다고 실실 웃어댔더니 멤버들이 밴드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유명 밴드에만 있는 줄 알았던 멤버 간 불화도 생겼다. 결국 둘이 나가고 한명이 새로 들어와서 남 셋, 여 하나의 4인조가 됐다. 금요일 밤 홍대 앞 연습실에서 합주를 하면 한주일 쌓인 스트레스가 풀렸다.

어느 날의 뒤풀이 자리였다. 나 말고 셋이 싱글이라 자연스레 연애 이야기가 나왔다. 연애는 좋은데 결혼의 압박감은 싫다며 맞장구들을 쳤다. 권커니 잣거니 하던 중에 신입 막내 베이스가 말을 꺼냈다. 사실은 자기가 게이라고. 이윽고 키보드 겸 세컨드 기타가 자기도 게이라며 받았다. 둘은 서로 알고 있었고, 커플은 아니니까 오해는 말란다. 당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막 웃었던 것도 같고. 드러머 여자 후배가 재치 있게 받았다. “밴드 했던 선배한테 밴드 하면 조심해야 될 거 물어봤거든요. 멤버끼리 연애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요. 밴드 깨진다고. 예, 했지만 은근 기대도 했죠. 나 빼고 다 남자니까. 그런데 한명은 유부남, 둘은 게이, 이게 뭐야!” 한참을 같이 웃었다. 과연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밴드들처럼 함께 연습하고 같이 놀았다. 연애만 없었다. 때로 즐거웠고 가끔 투닥거렸다. 조금씩 실력도 나아졌다.

저 기억이 떠오른 건 변희수 하사의 죽음 때문이다. 기갑의 돌파력으로 이겨내겠다던 그녀였는데 떠밀려 떠났다. 훌륭한 여군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던 그녀를 나라가 버렸다. 2월과 3월 사이에 이은용 작가, 김기홍 활동가까지 세명의 트랜스젠더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혐오와 차별에 맞서서 어떻게든 해보려던 이들이다. 알려진 이들만 이렇다.

성소수자는 특별하지 않다. 좋고, 나쁘고, 이상한 이들이 다 있다. 특혜를 바라는 게 아니라 차별 없이 함께 살기를 바란다. 미국에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직후 행정명령으로 트랜스젠더 군복무 차별 조치를 폐지했다. 막장 도널드 트럼프가 만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린 사례 중 하나다. “미국은 포용력이 있을 때 국내와 세계에서 더 강력하다”며. 세계가 무릎 꿇고 한국을 칭송한다는 ‘국뽕’의 시대라서 그런지 ‘천조국’ 미군의 사례도 안 먹힌다. 마크 램자이어 교수와 일본 우익의 한국인 혐오는 틀렸지만, 나의 성소수자 혐오는 맞다. 죽음을 전하는 기사의 댓글들을 보니 네이버와 다음이 총단결이다.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에 좌우가 따로 없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성소수자를 거부할 권리도 소중하다며 퀴어축제를 외곽으로 내몰겠다고 선언했다. 인권변호사 출신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아예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정체성을 반대한다니 놀랍고 아득하다. 노무현 정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처음 발의했지만 지금의 정부여당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검찰개혁 말고 정권에 부담스러운 의제는 꺼내지 말라는 것처럼 보이는 자칭 촛불정부다. 그사이 사람들이 추락하고 있다. 떠미는 손들에 내 손이 섞여 있는 것만 같아 명복을 빌기가 참담하다.

우리 밴드는 막내 베이스가 입대하면서 해산했다. 입대를 앞두고 데뷔 겸 은퇴 공연을 했다. 늘 틀리던 내가 그날 라이브 때는 기적처럼 한번도 안 틀렸다. 마지막 곡은 우겨서 내가 보컬도 했다. 박중훈과 노브레인 버전을 섞어서 ‘비와 당신’을 불렀다.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방방 뛰고 소리 질렀다.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다. 칼럼에 이 이야기 써도 되냐고 오랜만에 후배들에게 연락을 했다. 쉽지 않을 텐데 괜찮다고 말해줘서 고맙다.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못 전했다. 그때 말해줘서 고맙다고. 조박사는 정말 즐거웠다고. ‘함께’ 해서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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