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곤ㅣ제천간디학교 교장
인생이 고달픈 이유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얽혀서 그렇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친구 사이의 관계는 거의 모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몹시 예민하다. 관계가 흔들리면 주체가 불안정해진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들은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스스로 역량을 키우고 발전의 토대를 찾아 나서는 일에 집중한다. 작은 성취라도 얻게 되면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 여기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절로 높아진다. 재능 발견과 행복감 충족은 자아 신뢰감을 쌓게 만들어 정서의 선순환 구조를 이룬다.
교사가 난감한 순간은 학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가 심하게 뒤틀려서 서로를 불편하게 느낄 때이다. 감정에는 정답이 없는 것이어서 이럴 때는 그 누구든 제3자의 개입과 조정이 불가능하다. 기숙학교에서는 안전지대로 피할 시간이나 공간이 없다. 갈등 당사자와 대면해야 하니까. 아이들은 ‘살아야 하겠기에’ 시간이 걸려도 어떻게든 풀어낸다.
타인의 정서를 읽고 이해하며, 해결 지점까지 불편한 시간을 견디는 일도 엄청나게 큰 공부다. 이때 적절한 갈등 해결 의식(儀式)이나 절차를 학교가 마련하면 감정에 대한 자기객관화를 이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구성한 ‘평화정착위원회’가 이 일을 맡는다.
일반 학교에서 감정이나 정서 문제는 골치 아픈 존재다. 빠른 속도로, 많이, 경쟁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큰 걸림돌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관계 풀어내기 과정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겪는다. 갈등 해결 과정을 온전히 지켜보면 호기심과 학습동기가 자극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중3 때 반드시 제출해야 하는 논문은 기획에서 작성까지 9개월 정도 걸리는 긴 프로젝트이다. 지난 몇년 사이에 학생들이 선택한 주제 가운데 몇가지를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세 친구들과의 관계를 담은 안무 창작하기, 다양한 가족 형태를 담은 그림책 만들기, 나의 감정이나 관계에 대한 포토 에세이 쓰기, 내 친구들의 초상화 그리기, 간디인들의 관상을 봐주고 마음 북돋워 주기….
관계 따로, 공부 따로 놀지 않는다. ‘실전’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논문도 현재 생활의 관심사를 반영하면서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된다. 어떤 주제를 깊이 있게 배우는 심화학습의 한 요소로 ‘자기주도학습’이 빠지지 않는다. 이 뜻을 설명하는 영어 표현이 쉬우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학생 개개인을 운전석에 앉혀라.’(Put each student in the driver’s seat) 아무도 대신 운전해주지 못한다. 불안정성과 위기감을 고스란히 겪어봐야 스스로의 인생을 운전할 수 있다. 결국 그게 곧 심화학습이 될 터이고.
발달기 청소년들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본능이 좌충우돌한다. 애착, 탐구, 도피, 친교, 공격, 위계, 돌봄, 성적 본능이 살아 숨 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정과 정서가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수백가지 조합을 이루며 부딪칠 것이다. 그 모든 장면에 어른들이 개입하여 교통정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교사가 할 일은 아이들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며, 부모가 할 일은 불안감을 제어하는 것이다. 조금 더 욕심부리자면 건강한 가족관계를 만들어서 아이들이 필요할 때 줄 수 있는 심리적 지원 자원을 갖추는 것이리라.
스페인의 철학자이며 교육자이기도 한 호세 안토니오 마리나는 운영지능(executive intelligence)이라는 개념을 앞세운다. 그에 따르면 지능이 작동하는 첫번째 마당은 생각, 느낌, 욕구, 환상, 충동으로 채워진다. 나는 정서·표현 영역이라 이름 붙인다. 두번째 마당은 정서·표현 영역에서 올라온 행동을 통제, 전달, 지휘, 시작, 중단하는 일이다. 운영지능은 이 두가지 마당을 오가면서 적절히 행동하고, 판단하며, 실행하는 지능을 일컫는다. 관계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능력도 운영지능에 속하며, 이것을 잘 해내는 사람에게 ‘인성이 좋다’고 평가한다.
인성 교육이라는 말에는 모순과 어폐가 있다. 인성은 삶 속에서 부대끼면서 단련되는 것이지 교육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관계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힘과 기술을 기르는 것, 우리 교육제도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고, 제도가 잘 돌보지 못한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