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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졸업식 노래와 정순철

등록 2006-01-30 17:44수정 2006-01-30 17:46

도종환 시인
도종환 시인
도종환칼럼
삼 년 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담뿍 든 제자들과 헤어져야 하는 졸업식장에서 눈물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졸업식 노래였다. 요즘은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 갑니다” 하고 노래를 부르다 학생도 울고 선생들도 눈물을 훔쳤다.

이 졸업식 노래는 해방을 맞고도 우리 노래로 된 졸업식 노래가 없어서 교육 당국의 급한 간청으로 윤석중이 노랫말을 쓰고 정순철이 작곡해서 1946년에 만든 노래다. 정순철은 동학의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의 외손자다. 정순철의 어머니는 최시형의 맏딸인 최윤인데, 최시형과 함께 쫓겨 다니다 옥천에서 붙잡혀 옥살이를 하였다. 역도의 딸이 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옥천 군수가 아전인 정주현에게 데려다 살라고 주는 바람에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정순철이다.

정순철은 행복스럽지 못하고, 즐겁지도 않으며, 언제나 쓸쓸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술회한다. “낮이나 밤이나 홀로 외로웠습니다. 누나도 없고 동생도 없고,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의 따듯한 사랑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부드러운 웃음소리, 재미스러운 말소리가 어찌도 그리웠는지 모르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동요 <옛이야기>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정순철은 천도교인의 도움으로 일본 도요(동양)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방정환, 손진태, 진장섭 등과 함께 ‘색동회’를 만든다. 그리고 어린이 문화운동을 시작한다. 정순철은 윤극영과 함께 잡지 <어린이>를 통해 창작 동요를 작곡하고 보급하는 운동을 한다. ‘우리 아기 행진곡’이라 이름 붙였던 ‘짝짝궁’(짝짜꿍), ‘새 나라의 어린이’, ‘어깨동무’, ‘아기별’, ‘늙은 잠자리’, ‘나뭇잎배’ 등이 정순철이 작곡한 노래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으로 시작하는 ‘나뭇잎배’는 박홍근의 동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혼자 부르며 좋아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격동의 시기에도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작곡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을 쏟았던 정순철은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행방을 모르고 있다. 지난번 작가대회 행사로 평양에 갔을 때 찾아보니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2001년에 발행한 <계몽기가요 선곡집>에 ‘짝짝궁’과 ‘형제별’이 악보와 함께 수록되어 있고, 평양출판사에서 2003년에 발행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에 ‘형제별’이 정순철 작사 작곡으로 잘못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로 시작하는 이 동요는 방정환이 쓴 것이다.

북으로 가게 된 이후 정순철의 이름은 남쪽에서 점점 잊혀져 갔고, 지금은 거의 기억하는 이가 없는 비극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정순철은 “노래는 쓸쓸한 사람에게는 충실하고 유순한 동무가 되어 주고, 홀로 외로울 때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 그 외로움과 괴로움을 잠재워” 주는 것이라고 했다. “때로는 끝없는 희망을 말해 주며, 우리가 하는 가지가지 일에 리듬을 주는 다시없는 친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노래라고 했다.

졸업식 노래도 울림을 잃어가고 노래를 만든 사람도 잊혀졌지만, 다음주에 개학을 하고 나면 학교는 졸업식 준비로 분주할 것이다. 이 시대에도 정순철처럼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둘도 없이 친한 동무 같은 노래”를 만들고자 자기 인생과 열정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종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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