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21일 홋카이도 아사지노 일본군 비행장 공사에 강제동원되어 희생된 조선인 유해를 공동발굴하는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 정병호 제공
정병호ㅣ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해인 1987년 쾌청한 가을날, 오사카시 이쿠노 지역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 그곳에 사는 재일동포들이 ‘민족문화제’라는 이름을 걸고 하루를 즐기는 그런 행사였다. 풍물패가 골목길을 누비며 길놀이를 했다. 아직 서툰 솜씨로 장구와 꽹과리를 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차별이 두려워 이렇게 드러내고 놀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날 축제를 위해 빌린 일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다양한 민속공연과 마당극을 했다. 그 한구석에는 작은 동물원이 차려졌다. 특별한 동물이 아니라, 닭, 돼지, 송아지, 양, 염소, 토끼… 농가에서 키우는 가축들이었다. 밀짚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망아지에 아이들을 한명씩 태워 한반도 지도를 그린 하얀 선을 따라 한바퀴 돌아오며 말했다. “너희들은 통일된 조국의 남과 북을 마음껏 오가며 살아라!” 근교에서 농사일을 한다는 일본 사람 하나후사 료스케였다.
나는 그에게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일본 대신 분단된 조선에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태평양전쟁 때 군국소년이었던 자기는 조선인, 중국인을 멸시하는 것을 ‘일본정신’(야마토 다마시)이라고 배웠는데, 패전 뒤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들이 상처를 입힌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살기로 했단다. <엔에이치케이> 티브이 구성작가였다가 지금은 농업공동체를 만들어 농사체험 교실을 열고 있다고 했다. 민단과 총련으로 갈라진 동포사회 아이들이 함께하는 여름캠프를 연다고 해서 자원교사로 도왔다.
일본 아이들도 참여한 여름캠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일은 아이들에게 직접 닭을 잡아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끼리도 동물을 죽이는 ‘더러운 일’을 하던 옛날 ‘백정’ 출신들을 ‘부라쿠민’이라고 여전히 차별하기 때문이었다. 농사일은 생명을 키우는 일이지만 생명을 거두는 일이기도 하다고 우선 가르쳤다. 고기뿐만 아니라 쌀, 보리, 채소 모든 것이 생명인데 우리는 그런 생명들을 받아서 살아가는 생명들이라고. 다른 생명들을 소중하게 감사히 받는 법을 배우고, 사람들끼리는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반일정신이 충천하던 내 처는 저런 분과는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고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몇해 전 그가 “한 걸음 먼저 떠납니다. 천천히 누리다 오세요”라는 짧은 작별인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머지않아 그 뒤를 따를 나는 오늘도 그를 그린다.
일본에는 내가 좋아하는 오랜 친구도 있다. 홋카이도 시골 작은 절의 스님인 도노히라 요시히코다. 내가 처음 그의 어린이집을 보러 갔을 때 아이들은 맨발에 진흙탕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깊은 산속 자작나무 숲으로 데리고 가서 아직도 그 밑에 묻혀 있는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들과 만나게 해주었다. 나보다 열살 위. 큰형님뻘인 그와 ‘형아우 하지 않고 그냥 친구’로 지낸 지 30년이 넘었다. 일본식이나 한국식으로 형아우 하다 보면 서열의식이 생기니까 그리하기로 했다. 서로 별명으로 부르고 반말하며 그동안 많은 일을 함께했다.
2015년 9월17일 발굴한 유해를 고향 땅에 모시고 오는 ‘70년만의 귀향’ 추모식에서 헌화하는 도노히라 스님과 정병호 교수. 정병호 제공
우리 둘의 인연이 다리가 되어 1997년부터 지난 20여년간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함께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를 발굴했다. 수습된 유해 중에서 본적이 남한인 115구는 70년 만에 고향 땅에 돌아왔다. 그러나 북한 지역이 본적인 경우는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유해를 유족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도노히라 스님은 두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북조선 당국은 진지한 관심이 없었다. 작은 시민단체의 스님 한명이 유족을 찾아서 유해를 돌려주고자 한다는 그런 ‘어수룩한’ 이야기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일본 정부나 기업의 사죄나 보상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가능성 없는 그 일을 위해 거듭 평양을 방문해서 성심을 다해 설명하다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며칠씩 아팠다. 그렇게 우직한 그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수십년 동안 한결같은 그의 정성에 감동한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를 통해 역사적 상처를 더듬어 치유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고 상처 입은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그를 통해 일본 사람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되찾았다고 한다. 일본은 하나가 아니다.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함께 진실을 규명하고자 뜻을 모은 친구들은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국경을 넘나들며 협력하며 사는 법을 익히고 있다. 나는 이런 일본인들을 친애한다. 진실은 진정한 화해와 우정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