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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환기 대미 외교의 과제

등록 2006-01-31 18:30

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
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
세상읽기
북한의 달러 위조를 둘러싸고 한-미 관계가 불안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대북 압박을 통해 북한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미국 내의 일부 견해에 반대하며, 미국이 압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한-미 간에 마찰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달러 위조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맞받아쳤다. 6자회담의 공동당사국인 두 나라 정상이 이처럼 최우선 현안을 놓고 서로 받아치는 모습을 보면서 북-미 관계의 중재자 입장에 서 있는 우리 대미 외교의 최우선 과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냉전시대의 대미 관계가 미국에 대한 무지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전환기의 대미 외교는 미국 자체에 대한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현 북한 체제를 증오하는 미국 내 대북 강경파의 신념이 단순한 적개심이 아니라 200년 넘은 미국의 전통에서 나오는 정치적 신념이라는 것도 미국을 알아야 제대로 보이는 사실이다. 특히 혈연의 그물망도 없이 나라를 만든 미국은 혈연 민족주의를 이해할 수 없는 나라다. 냉전시대의 미국 외교사가 제3세계 민족주의에 대한 무지의 역사인 까닭도 이것이다. 그렇다면 ‘전체주의 북한’을 ‘동맹국 미국’보다 더 살가운 파트너로 싸안는 듯 보이는 한국의 태도를 민족주의로 이해하라고 미국에 바랄 수는 없다. 이것은 이라크의 저항을 미국이 전파할 ‘자유’로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미국 강경파들이 그들의 맹목적 신념을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바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금의 한-미 관계는 미국의 ‘자유’와 한국의 ‘민족’이 접점 찾기를 포기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차간 직설 화법은 오해와 부작용만 낳는다. 이번 노 대통령의 회견에 대한 에이피(AP)통신의 보도가 좋은 예다. 에이피통신은 노 대통령이 “북한 전체주의 정권을 강제로 붕괴시키려고 압박을 가하는 미국에 대해 경고했다(South Korea’s president warned Washington against pressuring North Korea to force the totalitarian regime’s collapse)”라고 타전했다.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추가됨으로써 노 대통령 발언의 뉘앙스가 강제적 대북 압박에 대한 반대에서 ‘전체주의’의 붕괴에 대한 반대로 바뀐 것이다. 분명히 오역이지만 미국의 시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정확한 번역’이다. 시각의 차이란 이런 것이다.

이처럼 대안 없는 경고로는 지금의 미국을 움직일 수 없다. 차라리 “북한 체제의 강압적 붕괴보다 북한 체제의 점진적 개방과 변화만이 한반도 평화 정착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로 중재와 대안의 여지를 남겨두는 방법이 더 현실적이다.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외교 문제를 개인적 직설 화법으로 돌파하는 방식은 상호 이해 대신 상호 오해만 굳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제는 지금부터다. 주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합의로 인해 한-미 상호방위조약 개정 문제까지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 얽혀들 가능성이 커졌다.

또 곧 발표될 세 번째 ‘4개년 국방전략 보고서’(QDR)에서 미국 국방부는 ‘결정적 승리’의 의미를 ‘점령’이 아닌 ‘정권 교체’로 이미 바꾸었다. 적대국에 아예 민주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미국의 궁극적 안보라는 신념이 드디어 전략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일이 이쯤 되면 한국의 대미 외교는 미국의 ‘자유’와 한국의 ‘민족’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접점을 찾을지 그 가능성부터 큰 눈으로 모색해야 한다. 전환기 대미 외교의 최우선 과제는 이것이다.

권용립/경성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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