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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다시 4·16, 교육의 책임을 되묻다 / 이병곤

등록 2021-04-07 16:23수정 2021-04-08 02:08

이병곤ㅣ제천간디학교 교장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교육 기반도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어른 말을 거슬러야 살아남는 사회는 교육이 불가능한 사회다.” 7년 전 5월, 이문재 시인은 이렇게 적고 있었다. 세월호. 교육. 모니터에 달랑 두 단어만 입력한 뒤 가슴이 먹먹하여 4시간째 글을 시작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고, 무엇 하나 나아진 것 없는 상태 그대로 일곱 해가 지났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다시 펼친다. 세상에서 책장 넘기기 가장 어려운 책 가운데 하나다. ‘수현이 아버지는 장례를 치른 뒤, 아이가 사용하던 노트북을 뒤적거렸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아이의 흔적은 다 간직하고 싶었다. 거기에는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만들었을 음악의 몇 마디가 남아 있었다. 미완성된 소리들 사이에서조차 아이의 흔적이 묻어났다. 아이가 가졌던 정서와 아이가 고민했던 시간들이 거기에 있었다. 수현 아버지는 혼자서 아주 오랫동안 그 흔적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다.’

책에 담긴 열세 가정 아이들의 일상은 재난 사건 앞에서 갑자기 단절된다. 정지된 화면 같은 디테일을 더듬다 보면 평소 주목하지 않던 아이들 삶의 고귀한 단층 앞에 서게 된다. 획일적 디자인으로 제작한 교복으로는 결코 덮지 못할 그들만의 고유한 삶이 형형색색 드러난다.

대형 선박 침몰과 승객 구조 외면 사태를 곧바로 교육 체제의 실패와 연결 짓기란 어렵다. 세월호는 특정한 ‘사회구조’ 속에서 전복되었다. 10명을 두 편으로 가를 때 동그랗게 모여 한 손의 등이나 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내미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손을 내밀었던 것은 각자의 목적 때문에 그리한 것이겠으나 그 결과 10개의 손은 특정한 원형의 모습을 형성한다. 개인과 구조는 그렇게 직조된다. ‘구조적으로 부정의’한 사회는 어떻게 생길까. 특정한 사람이 악한 뜻을 가지지 않아도 만들어진다. 은행 금리보다 부동산 투자로 더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으면 모두 집이나 땅을 사려고 한다. 모든 참여자가 합리적으로 행동했으나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르는 부정의 구조가 역설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구조적 부정의 때문에 개인이나 집단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변화를 위해 실천해야 할 책임(responsibility)’이 부여된다. 그것은 법적인 책임(liability)이나 공적인 책임(accountability)과 구별되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인 것이다. 이 지점이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1949~2006)이 주장한 ‘사회적 연결 모델’의 핵심 사유다. 세월호 재난 사건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큰 슬픔의 집단 상속자가 되는 동시에 구조적 부정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사회적 실천 행동의 담지자가 된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인간 존엄을 위한 교육을 최우선에 두라고. 세월호 선장과 선원, 해양경찰, 해군, 청와대, 국토교통부, 관제센터 관계자 모두 배가 가라앉을 때까지 ‘조직의 위계와 명령’에 충실했다. 사고 해역 주변의 민간인 몇을 제외하곤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선 공무직 담당자들의 책임 있는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요청한다. 이것이 아니다 싶은 상황에서는 “아니오” 하며 외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라고. 독립적으로 사유하며 비판적으로 의식하는 개별자를 키워야 한다. 다음 세대에게 침묵과 복종, 순응을 강요하지 말라. 우리의 가족 관계는 입시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패밀리 비즈니스’ 공동체다. 학교는 학생의 능력을 선별하고 그에 따라 상급 교육기관에 신입생을 배치해주는 에이전트 역할에 그치고 있다. 법령, 제도, 관습으로 정교하게 기획된 체제 아래서 다음 세대는 능력주의와 승자독식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아무렇지 않게 체화한다. 대형 재난 사건은 단일 요인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세월호는 부정의한 구조 한가운데서 침몰한 것이다.

“인적만 남은 텅 빈 한길에서 내가/ 왜 부르르 부르르 낙화하여 몸 떨었는가/ 남도에서 꽃샘바람에 흔들리던 잎새에/ 보이지 않는 신음 소리가 날 때마다/ 피같이 새붉은 꽃송이가 벙글어/ 우리는 인간의 크고 곧은 목소리를 들었다”(하종오, ‘사월에서 오월로’ 중에서)

“잊지 않겠습니다.” 며칠 전 이 문장이 큼직하게 박힌 대형 펼침막을 우리 학생들과 공동으로 제작하여 운동장 한가운데 걸었다. 사회적 연결 모델의 핵심에 교육이 자리한다. 기억과 다짐을 실천으로 이어갈 오늘, 다시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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