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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자해적 여성징병제 논의 / 김종대

등록 2021-04-29 13:38수정 2021-04-30 02:37

김종대ㅣ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예전엔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낳은 직후의 여성이 남편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있었다. “이 아이도 크면 군대 가겠지?” 산부인과 의사들은 “이상하게 엄마들이 비슷하더라”고 말한다. 그게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인지상정이었다. 군대란 당사자인 남성에겐 상실과 희생, 단절의 기간이지만 어머니들에게도 이별과 슬픔의 원천이었다. 군대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아들이 입대하는 날에 훈련소 앞에서 어머니들이 펑펑 우는 걸 보라. 아직도 한국 남성들의 악몽 1위는 ‘군대 다시 가는 꿈’이다.

입대하는 청년에게 국가는 마땅히 다음과 같은 말을 해야 한다. “복무기간 중에 사회의 최저임금은 보장한다”, “만일 다치기라도 하면 국가가 책임지고 완치할 때까지 치료하겠다”, “복무 중에 개인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한다”, “사회 나가서도 군 복무가 경력으로 활용되도록 힘껏 돕겠다”는 말이다. 너무 무리한 요구인가? 제대로 된 징병제 국가들의 군대는 최소한 이 정도의 말은 한다. 베트남, 타이, 이스라엘, 이집트, 노르웨이, 터키, 독일 등등 대부분의 징병제 국가들이 그렇다. 우리나라 군대는 어떤가? 언감생심. 바랄 걸 바라야지. 첫날부터 윽박지르고 정신이 나가도록 뱅뱅 돌리면서 그게 애국이요, 의무라고 주입한다. 병사들에게 교도소 노역장 수준 임금의 절반도 주지 않는 나라, 군대에서 다치거나 병이 들면 국가 유공자 대우는커녕 제대하면 치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이런 말은 사치다.

문재인 정부에서 병사 봉급 인상, 휴대폰 허용, 외출과 외박의 자유화 등 처우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병영도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병사들은 공짜 인력”으로 인식하는 한국 징병제의 본성이 달라진 건 없이 억압적인 규율을 일부만 없앤 수준이다. 그런데 최근에 “여성도 징병하자”는 국민청원이 등장하는가 하면, 여성에게도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부과하자는 말까지 정치권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병역에서 성평등을 구현하자는 취지라지만 한마디로 자다가 봉창 뜯는 이야기다. 한국 징병제가 어디 제대로 된 징병제라야 이런 말도 할 법한 것 아닌가. 이 말의 배후에는 역차별받고 있다고 믿는 소위 ‘이대남’들의 감성을 건드려 표를 모으겠다는 정치권의 불순한 의도는 없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남성 청년들 표의 힘이 결집된 4월 보궐선거가 끝난 직후에 여성 징병 논의가 부각되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제는 남성들만 피해 보지 않겠다며 잘못된 병역제도의 화살을 여성에게 돌리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지 우려되는 바 크다. 여성도 군대 가야 공정한 사회라는 주장이 남성 청년들의 집단정서로 형성되면 젠더 갈등은 필연적이다. 이것이 군 가산점제 부활, 여성할당제와 같은 의제로 확전되면 우리 청년세대는 사실상 성별로 나뉜 내전 상태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그 폭발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4월 보궐선거에서 일단이 드러났다. 후각이 뛰어난 정치인들이 벌써 냄새를 맡고 청년 편 가르기에 뛰어들었다.

국가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고립과 단절을 경험한 세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 군대는 외형적으로 구별되는 혼혈아의 군 입대를 차단하고 있다. 성 소수자를 불법화하면서 최근 변희수 하사를 죽음으로 내몬 군대다. 같은 남성에 대해서도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하고 성별이 혼란스럽다며 소수자를 용납하지 않는 군대, 성적 위계질서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군대가 난데없이 여성에게 징병을 확대하겠다고 한다면 누가 그 진정성을 믿겠는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군대가 여성을 대규모로 징집할 이유란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하고, 설령 여성을 징집한다 한들 우리 병영이 감당할 방법은 없다. 여성 징집론자들은 군의 차별적 문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런 논란이 아니더라도 인구 감소로 한국 징병제는 파산 직전이다. 10년 후에는 유지되기조차 어려운 징병제를 두고 공연히 젠더 갈등으로 몰고 가는 자해적 논의는 중단되어야 한다. 징병제 자체의 존폐를 검토해야 할 시기에 웬 여성 징병인가. 그러면서 국가 안보를 말하는 그 얄팍함이 놀랍다. 남성 청년들을 두번 울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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