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황필규ㅣ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얼마 전 약 2주간에 거쳐 매일 저녁 인권 관련 국제 심포지엄에 참여했다.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출장을 가서 참여할 프로그램이었지만 불가피하게 주경야독(?)을 했다. 20여명의 여러 나라 인권활동가들이 인권 역량과 연대의 강화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새로운 고민을 발전시키는 자리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읽을거리는 국제앰네스티에서 32년간 일해온 65세 활동가의 자살에 관한 2018년 보고서다. 한국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어온 세대 간의 차이, 인권감수성의 차이, 구성원 간 소통의 정도와 방식, 각자가 처한 취약성과 조직의 지지, 지원 여부, 권한과 의무의 명확성 정도, 존중과 가치 인정의 문화 유무 등등의 문제가 제시된다. 인권활동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다른 구성원을 온전히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나 다양한 강점과 약점이 있다. 강점은 많은 경우 조직과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충분히 인정되고 평가되지 않는다. 조직은 각 구성원의 강점을 최대한 존중하고 이를 최대한 펼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하지만 그 강점은 무시되고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은 차단된다. 약점은 많은 경우 개인적으로는 제대로 인정되거나 반성, 시정되지 못한다. 조직적으로도 그 극복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 이루어지기보다는 ‘무능’이나 ‘골칫거리’라는 낙인이 이루어진다. 조직과 개인이 분리되고 모든 잘못은 개인 탓으로 돌려진다. 서로의 약점과 취약성을 충분히 알고 이를 고치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이를 공감과 연대의 기초로 삼으려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권리의 ‘언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인권을 위한 언어는 단순히 ‘인권’이라는 표현을 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접근을 할 것인가,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고 설득력이 있고 잠재적 지지자를 확장하는 언어인가에 제대로 답해야 한다. 때로는 인권의 원칙을 직접 강조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어떤 필요가 있는 것인지, 사회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떤 이야기들이 존재하는지를 말해야 한다.
존중에 기초한 연대란 무엇인지, 당사자 중심주의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인권에 기초한 접근에서 당사자/피해자 중심주의는 그 핵심이라고 볼 수 있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피해자가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과정에서 대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정체성을 절대시하는 접근의 위험성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모든 정체성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연대와 다름에 대해서는 미국의 자칭 “흑인, 레즈비언, 엄마, 전사, 시인”인 한 운동가의 1979년 페미니즘 회의 발표문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거의 다 백인 페미니스트 발표자들로 채워진 회의를 보면서 다름을 직시하지 못하는 인종주의일 수 있다고 일갈한 내용이 담겼다. 다름이란 취약성과 차별에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권력구조에 의해 그 다름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규정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기에서부터 연대가 시작된다.
주최 쪽에서 보내준 한 터키 작가의 옥중서신을 읽었다. 이 작가는 세개의 칼럼과 한개의 인터뷰를 이유로 “종교적 반역자”가 되어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0일 후 같은 법원에서 사실상 같은 증거를 가지고 “마르크시스트 테러리스트”로 또 하나의 재판을 받는다. 재판이 시작되고 잠시 후 3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재판부는 마이크를 끄고 2~3분간 논의한다. 논의 중 우연히 마이크가 켜지고 재판장의 말이 울려 퍼진다.
“이런, 이러다간 5시 퇴근버스를 놓치겠어.”
그리고 작가에게는 6년의 징역형이 선고된다. 작가는 말한다.
“3분 동안, 나는 6년형에 처해졌고, 판사들은 공짜 버스를 놓쳤다. 우리는 모두 당황했지만, 판사가 나보다는 좀 더 당황한 것 같았다.”
나와 내가 속한 조직, 그리고 다양한 시공간을 되돌아본다. 학살자의 후예들, 학살의 떡고물로 권력을 누려온 이들,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 가해자의 언어로 민주와 통합을 내세워 학살을 지우려는 엽기적인 현실. 법망을 피해 간 범죄자가 범죄 없는 마을을 만들자고 나서는 꼴이다. 되돌아보고 성찰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