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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어린이 해방

등록 2021-05-26 14:07수정 2021-05-27 02:36

공동육아 어린이집 아이들의 나들이 모습.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제공
공동육아 어린이집 아이들의 나들이 모습.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제공

정병호ㅣ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1922년 5월1일 노동절, 첫번째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다. 서울 거리에 ‘어린이해방’이라고 쓴 깃발이 나부끼고, 전국에 선언문 12만장이 배포되었다. 1924년 국제연맹의 ‘아동권리선언’보다 앞선 세계 최초의 어린이권리선언이었다. 방정환, 김기전 선생이 만든 선언문은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라.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사회적 시설을 만들라”고 주장했다.

이듬해인 1923년 5월1일, ‘어린이날’ 깃발을 들고 나선 어린이들은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는 구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이 행진을 못 하게 하자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라는 당부가 담긴 ‘어른들에게 전하는 글’을 배포했다. 해방과 희망의 상징이 된 ‘어린이날’ 행사는 1925년에는 30만명이 참가하는 거대한 깃발 행진이 되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은 ‘해방’되었는가? 아동학대와 과잉보호, 대리경쟁과 강제학습에 내몰려 있다. 양상은 달라도 원인은 마찬가지다. 어른이 어린이를 자기 소유물처럼 함부로 다루거나, 약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 과도하게 감싸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어린이들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새로운 결핍을 경험하고 있다. 핵가족 안에서 인간관계 경험은 희박해졌고, 디지털 미디어로 세상과 자연을 체험하고 탐색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온실 같은 공간에 갇힌 몸은 운동부족으로 둔해지고, 학습경쟁으로 내모는 부모의 ‘조건부 사랑’에 매달리는 마음은 애정결핍에 시달린다. 100년 전 어린이운동이 봉건과 식민과 가난으로부터 ‘해방’을 목표로 했다면, 지금은 어른들의 욕망과 경쟁과 과잉으로부터 ‘해방’이 절실한 상황이다.

코로나19와 같은 역병 재난과 환경 위기를 겪기 시작한 지금 아이들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하다. 스웨덴 소녀 툰베리는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를 망치고 있는 어른들에게 일갈했다. “당신들 어떻게 감히!” 불길하게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지구 생태와 인류 문명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한계상황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들이 추정하는 파멸의 시기는 나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2070년? 2050년? 그때 당신의 아이는 몇 살인가?

인류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 어른들이 강요하고 있는 ‘경쟁’은 파국을 앞당길 뿐이다. 수백만년 동안 인류 생존의 열쇠였던 ‘협동’이 필요하다. 경쟁 만능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며 우리는 너무 빨리 공동체 관계와 협동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살았다. 어린 나이부터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공감, 협동, 공존 경험이 결핍된 상태로 자라고 있다.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생존 능력’을 키우지 못한 채 외롭고 불안하게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인류적 차원의 필사적 협동과 창의적 대응만이 살길이다.

협동하는 아이를 키우려면 먼저 어른들이 협동해야 한다. 경쟁사회의 압박 속에서 그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어른들이 있다. ‘우리 아이 함께 키우기,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기’를 목표로 삼은 부모와 교사들이다. 27년 전, 협동조합 어린이집을 만들면서 시작한 공동육아운동은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공동체교육운동이 되었고, 다양한 생활영역으로 확산되어 지역공동체운동이 되었다. 이제 정년을 맞은 초기 조합원 부모와 교사들은 노년기에 함께 생활할 생애공동체 만들기를 시작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놀면서 뭘 배웠니?” 아이들은 거침없이 말했다. “재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조금 길게 대답했다. “내 말만 하면 안 되고 다른 아이들 이야기도 듣고 같이 사는 거.” 공동육아로 큰 20대 청년들에게도 물었다.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방법이 가장 컸고, 다음은 자연의 변화 방식을 조금 이해하게 된 것” “어른들이 우리 편이라는 것.” 그렇게 아이들은 함께 성장했다.

창의력은 반복 학습이 아니라 엉뚱한 생각을 실행해보는 용기와 놀이 정신에서 나온다. 정서지능을 키우는 제일 좋은 방법도 친구들과 더불어 노는 것이다.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크고 작은 어려움을 함께 겪어본 아이들이 다가오는 위기를 헤쳐나갈 용기와 지혜를 갖는다. 100년 전 5월, 어린이날의 표어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희망을 살리자! 미래를 살리자!” 서로 곁눈질하며 경쟁하기보다 함께 손잡고 놀며 세상을 탐색하는 그런 아이들이 희망이고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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