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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찬솔이가 들고 온 ‘죄와 벌’

등록 2021-06-02 14:03수정 2021-06-03 02:39

[세상읽기] 이병곤ㅣ제천간디학교 교장

“올바른 목적이 나쁜 수단을 정당화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요? 하아~ 그것참 한마디로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허찬솔(17살). 2005년생 남자아이. 수도권의 공립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큰 키에 깡마른 체형을 가진 4학년(고1) 학생이다.

찬솔이는 1천쪽에 이르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느라 지난 한달간 씨름했다. 아이가 들고 온 책에는 푸른색 간지 12개가 붙어 있다. 모두 내게 던지려는 질문 덩어리들이리라.

찬솔이는 3학년 마칠 때까지 수업을 단 한 과목도 듣지 않았다. 한 학기에 평균 30과목 이상의 선택지가 담긴 교과 차림표를 제공했음에도 아이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메뉴가 없었나 보다.

“내가 기억하는 너의 1, 2학년 때 인상이 뭔 줄 아니? 깨진 유리 조각들이 비닐봉지 옆을 찢고 여기저기 삐죽 튀어나온 느낌이었어.” 아이는 그것도 ‘다 지난 시절’ 이야기라는 듯 배시시 웃기만 한다.

당시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수업을 거부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막연히 귀찮고, 하기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틈만 나면 잤고, 기운 차리면 학교 근처 선고저수지 주변을 쏘다니거나 학교에서 4.5㎞ 떨어진 덕산면으로 놀러 다녔다. 단, 전통무예 동아리 ‘경당’ 활동 하나만큼은 열심히 했다.

“3학년 때부터 조금씩 마음에 변화가 일었어요. 친구들은 진로 고민을 하더라고요. 나는 무엇을 좋아하나 찾기 시작했어요.” 찬솔이는 3학년 말에 반드시 제출해야 하는 ‘논문’과 마주쳤다. 9개월 과정의 긴 프로젝트인데, 아이는 소설 작품을 쓰기로 했고, 막판에 집중력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 <절대다수>. A4용지 기준으로 64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이었다. 논문 심사를 해야 했기에 약간의 의무감으로 종이 뭉치를 펼쳐 들었던 나는 어느새 이야기 구조에 빠져들었다. 남자 기숙사, 도난, 집단 심리, 불합리한 회의 구조, 인간 본성, 신뢰, 경솔한 행동 등 여러 요소들이 중층으로 엮여 있었는데, 안정된 플롯은 물론 등장인물의 심리나 성격 묘사까지 제법이었다.

“어떻게 한 인간에게서 타락한 악마와 숭고한 천사의 이미지가 동시에 느껴질까요? 게다가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처럼 지식인이 아니었는데, 그런 고귀한 품성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죄와 벌> 한 구절을 짚으며 네가 이렇게 질문했을 때 무어라 대답은 했던 것 같은데, 찬솔아, 지금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나도 잘 모른단다.

찬솔이는 아침 먹으러 학교 식당에 일찍 오는 아이였다. 약속하지 않은 ‘조찬모임’ 하듯 밥상 앞에서 자주 마주쳤다. 끼니마다 배식할 때 교사나 학생 모두 동등하게 줄을 선다. 2열로 길게 늘어선 밥줄 사이에서 오가는 짤막한 대화들, 그것이 켜켜이 쌓여 상대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나는 찬솔이를 그렇게 ‘발견’했다.

작년 2학기 때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 한권을 선정하여 전교생에게 소개한 뒤 그 책을 ‘누구에게 읽도록 권하고 싶다’는 메시지 전하기 행사가 있었다. 내게도 순서가 돌아왔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안학교 이야기를 담은 <서머힐>을 요약해서 전한 뒤 이 명저를 “허찬솔이 읽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한달 뒤 아이는 다 읽은 책을 든 채 내 방을 노크했다. “샘, 왜 하필 저였어요?” “글쎄, 네가 아니었을 이유는 또 뭔데?” 잠시 눈빛이 마주쳤고, 곧 우리의 대화는 시작됐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에서는 소크라테스 선생이 기하학을 한번도 배워본 적 없는 노예 소년에게 정사각형의 길이와 면적, 비례의 개념을 하나씩 짚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따라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소년은 기하학 개념을 이미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모든 배움은 상기’임을 증명하는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4년 만에 처음으로 두 과목 신청했어요. ‘한국사 특강’하고 ‘동물윤리’. 생각보다 재미있어요.” 눈빛 반짝이는 찬솔이. 다음 읽을 책으로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선을 정해두었고, 조만간 두번째 창작 소설을 집필할 계획이라 전했다.

나는 아직 인간이 지닌 고귀한 품성의 출처도 모르겠고, 배움의 동기와 깨우침이 정말로 잊었던 기억의 되살림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 하나는 말할 수 있다. 선생과 부모가 아이를 믿고 뭉근하게 기다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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