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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윤석열을 향한 저주?

등록 2021-06-07 14:02수정 2021-06-08 02:08

[세상읽기] 한승훈 ㅣ 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최근 ‘저주’ 현상에 대해 자문할 일이 종종 생긴다. 딱히 전문 분야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몇몇 논문에서 조선시대의 저주 사건을 언급한데다가 최근에는 ‘한국인의 저주의 역사’(허프포스트, 2021)라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도 한 탓이다. 들리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흉흉하다. 어느 집성촌의 선산에서는 무덤들에서 수십개의 쇠말뚝이 나왔다. 헤어진 연인이나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해치는 비방술을 해달라고 요구받은 무당들 얘기도 있다. (편견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무당들은 신령들과 자신의 ‘관계’를 해칠 수 있는 저주 행위에 동참하는 걸 꺼린다.) 그 가운데에서 단연 인상적인 것은 유력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조부 묘소에서 발견된 저주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이다.

5월19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무덤에는 인분과 계란 껍데기 등의 음식쓰레기가 놓여 있었고, 땅속에는 식칼, 부적, 머리카락 한뭉치 등이 묻혀 있었다. 목격자는 묘를 관리해온 친척이었으며 오물은 그 자리에서 치워버렸다고 한다. 최초 보도에는 경찰 쪽에서 내사 중이라는 내용도 들어가 있었지만, 후속 보도들에 의하면 묘원과 경찰에서는 보도가 있은 다음에야 묘역을 확인했으며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장 증거 사진은 “너무나 혐오스러워”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사실 관계에 다소 혼선이 있지만, 전근대 종교사 자료들에 비하면 이 정도의 불일치는 검토하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선 저주 행위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가정하에 그 형식을 살펴보자. 구덩이를 파고 위험하거나 부정한 물건을 넣어두는 것은 매흉(埋凶)이라고 하는 대단히 유서 깊은 저주 방법이다. 땅에 묻힌 저주물은 대상의 건강을 해치고 서서히 죽음으로 이끌 것이라 믿어졌다. 여기에 조상의 시신 상태는 후손의 운명과 감응한다는 믿음이 더해지면 선조의 무덤에 흉측한 물건을 묻어 대상을 불행하게 만들겠다는 술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수많은 정치 세력의 운명을 갈랐던 조선시대 궁중 저주 사건의 상당수는 저주 대상의 거주지에서 매흉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내용물은 주로 인간이나 동물의 뼛가루였으며, 새끼고양이나 병아리를 죽여서 말린 것, 어린아이의 시신 일부, 무덤 위에서 자란 나무 등 그야말로 흉흉한 물건들도 이용되었다. 궁중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이런 저주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지, 매흉한 물건을 찾아서 제거해주는 전문적인 업자들이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 저주의 효과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만약 저주가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고 범인을 색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를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저주는 흉악한 범죄로 다루어졌다. 다만 직접적인 상해 시도에 비하면 저주의 시행자와 목표, 의도를 입증할 방법은 모호하다. 게다가 증거를 찾기는 힘들지만, 상대적으로 증거를 조작하기는 쉽다. 그래서 무고(巫蠱: 저주) 사건은 무고(誣告)로 밝혀지는 경우도 흔했다. 물론 옛날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저주에 대한 고발이 있으면 조사는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실제로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주술 행위가 일어났을 가능성, 다른 하나는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해 날조된 사건일 가능성이다. 저주의 누명을 씌우는 일에도 위험이 따랐다. 거짓 고발을 한 사람은 고발한 범죄의 형량을 기준으로 처벌받는다는 반좌율(反坐律)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저주 사건이 발발하면 결국 누군가는 크게 다쳤다.

그러나 저주의 효과를 믿는 사람이 적어진데다가 범죄로 인정되지도 않는 오늘날은 양상이 매우 다르다. 이제 유명인에 대한 저주는 은밀히 행해지기보다는 유희와 과시의 수단이 되었다. 동조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 ‘정신적’ 충격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행위는 혐오스럽고 비도덕적으로 여겨지므로 적대자들에게는 좋은 역공 대상이 된다. 이른바 조국 사태 당시, 일부 누리꾼들은 부적이나 인형을 만들어 ‘공개적으로’ 윤석열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 사실관계가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성급하게 이루어진 <조선일보>의 보도는 조국 사태 당시의 ‘저주 인증 놀이’와 이번 ‘테러’를 같은 맥락에 놓는 전략을 택한다. 그 암묵적 메시지는 이렇다. ‘윤석열을 비난하는 민주당 강성 지지자들은 미신을 믿는 패륜적인 집단이다.’ 21세기에도 저주 사건은 여전히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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