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이나연 ㅣ 제주도립미술관장
이건희 컬렉션 1만3천여점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전국 국공립 미술관에 기증돼 화제다. 기증 절차는 각 지역 미술관의 성격과 관리 능력에 맞게 기증자의 의사가 반영돼 완료됐는데,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낸다. 이참에 국립근대미술관을 짓자는 논의가 있다. 이건희미술관을 유치하려는 지역들이 막대한 예산을 내세우며 경쟁을 하기 시작하면서, 미술관이란 단어 자체가 주목받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유명 작품이나 유명 작가의 전시가 아니라 컬렉션이나 미술관 건립 자체가 이렇게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미술관 자체에 관심을 갖는 분기점이 마련된 것도 사실이다. 각 지역에 하나쯤은 있는 것, 혹은 여행을 가면 들러 보는 곳, 유명한 기획전이 열리면 기간에 맞춰 찾아가는 곳이라는 개념만 있던 이들이 진지하게 미술관이란 무엇이고, 왜 이건희 컬렉션을 모든 지자체에서 모셔가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제주도도 이중섭미술관 덕에 이중섭 원화 12점을 기증받게 됐고, 그 귀한 작품들을 제대로 선보이기 위한 이중섭미술관 시설 확충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긍정적 계기가 마련됐다.
영어로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모두 뮤지엄이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분지어 부른다. 미술관은 박물관 중에서도 특히 미술 소장품들을 수집하고 보존, 연구, 전시하는 기관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시실과 수장고 등을 갖춘 본격 미술관이 생긴 것은 1938년에 문을 연 덕수궁 내의 이왕가 미술관이었다. 박물관에서 미술품들만 따로 모아 설립한 방식이었다. 한국에서 미술관의 역사는 아직 100년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지만, 그간 많은 부침을 겪으며 전쟁 중엔 부산에도 갔다가, 전쟁 후엔 덕수궁으로 돌아왔다가, 1986년에 지금의 과천으로 자리를 옮기며 국립현대미술관이 됐다. 과천은 물론, 덕수궁, 서울관, 청주관 등으로 범위를 넓히며 미술관의 기능을 수행해온 국립현대미술관은 이건희 컬렉션 중에서 가장 많은 1488점의 작품을 기증받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곳이었음에 이견은 없다. 청주에 마련해둔 잘 정비된 수장고와 보존처리실이 있어 신뢰를 더한다.
최근의 뉴스들만 보면 미술관의 영향력이 실로 엄청나 보인다. 정말 새로운 미술관은 필요한 걸까? 다른 지역까진 살필 필요도 없이, 제주의 실정만 들여다봐도 새로운 미술관 건립에는 거대한 물음표를 띄우게 된다. 미술관은 흥미로운 기획전시를 하는 근사한 전시장의 역할도 해야 하지만, 그 안에 보유하고 있는 미술품의 질과 연구인력, 보존처리 전문인력 등을 갖추고 문화 역량을 쌓는 일이 더욱 중요한 기능이다. 미술관을 대표할 만한 소장품을 단숨에 확보하면 미술관을 내세워 지역을 문화관광지로 만들기가 쉬워지는 건 사실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해외 유명미술관의 분관을 유치하는 일도 미술관으로 지역도시의 브랜딩에 성공한 ‘빌바오 효과’로 언급되며 반복적으로 검토된다. 접근 방식은 달라도 이 모든 일을 해내기엔 전문인력과 예산의 안정적인 확보가 가장 중요한데, 기존에 지역의 역량에 맞게 지어진 미술관들이 매끄럽게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각 지자체에서 이건희미술관 건립을 약속하며 내놓는 몇천억원에 가까운 예산들에 놀란다. 미술관은 짓고 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전시, 보존, 연구를 위해 매일 움직이는 생명체기 때문에 설립 예산만큼 운영 예산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이건희 컬렉션이 풍성해질 수 있었던 건 당연히 풍부한 재원을 아낌없이 쏟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이미 가지고 있는 우리 지역 우리 미술관에 관심을 돌려봐야 할 때가 아닌가. 각 지역 국공립 미술관의 현황을 점검하고 제도를 개선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