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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의 볼록렌즈] 단어 하나

등록 2016-02-17 21:45수정 2016-02-17 21:59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머리를 하려면 많이 기다려야 하냐고 물었다. 곱게 빗

질을 해가며 내 머리를 잘라주던 미용사는 “이분 마무리는 해드려야 해요” 하고 대답했다. 마무리라는 단어 때문에 잠깐 내 얘기가 아닌 줄 알았다. 이제 막 의자에 앉아서 이제 막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용사는 손님에게 기다림의 여부를 어느 쪽으로도 확정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단지 ‘마무리’라는 단어만을 사용했다. 손님은 그 단어에 실린 뜻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받아들이고서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여기저기 전화도 걸고, 이런저런 잡지들도 들춰가며 딱히 지루해하지 않으며 당연한 듯 기다렸다. 이럴 때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은 미용사의 어법이 마음에 들었다. 우선, 상술로서는 그만이었다. 손님은 미용사의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미용사는 손님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지만 손님의 판단력을 지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간접적이지만 의도적인 단어 하나를 보탤 뿐이다. 아무 불평 없이, 마무리라 하기엔 너무 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손님의 순순한 모습을 보자, 동네 장사를 하기에 영 무뚝뚝하고 눌변으로만 보이던 미용사가 고수처럼 느껴졌다. 머리를 다 자르고 미용사가 드라이어를 손에 들자, 나는 이제 됐다고 바쁜 척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무리’라는 단어에 내포된 소요시간이 마음 쓰이기도 했지만, 미용사에게 협조적인 행동을 하고 싶었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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