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만에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 의혹이 윤곽을 드러냈다. 박정희 정권이 외국에서 현지의 조직 폭력배를 고용해 살인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가 권력이 마피아 뺨치는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얘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정인숙 살인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등 박 정권 때 행해졌던 여러 납치·살해 사건 중에서도 1979년에 발생한 김씨 실종사건은 유독 짙은 흑막에 가려 구구한 억측을 낳아 왔다. 이제라도 진상이 완전히 밝혀져 민주·인권을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씨는 중앙정보부장으로 6년3개월을 재직하면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광신적일 정도로 충성을 했던 인물이다. 그러던 그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듯 권력에서 멀어진 뒤 마침내 화살을 박 정권에 겨누자, 정권은 회유·협박에 이어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박 정권은 미국에서 김씨가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고 회고록을 집필하자 50만달러를 주고 원고를 매수했다. 그런데도 입을 다물지 않자 파리로 유인한 뒤 조폭을 동원해 살해하고, 주검 처리를 확인한 뒤 돈을 지급했다고 한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실패를 교훈삼아 정보기관이 직접 나서지 않고 현지 ‘조폭’을 활용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비리 폭로를 막으려 거액의 공작금을 쓰고, 영원히 입을 틀어막으려 살인까지 자행한 독재 권력의 추악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보기관이 나라와 국민은 뒷전이고 절대 권력자의 수족 노릇에 충실했던 것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김씨 사건에 관여한 중앙정보부 요원은 8명이고 모두 생존해 있다고 한다. 납치·살해 등으로 죄질이 무거운 사건이어서 입을 열기 쉽지 않을 듯하다. 진실과 죽은자의 편에 서서 진상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어둠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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