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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민간인 살육이 민주주의 확산인가

등록 2006-06-02 18:41

사설
군인들이 인근 민가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총질을 했다. 휠체어를 탄 70대 노인과 네살배기까지 가슴에 총을 맞았다. 열세살 소년은 목숨을 건지려 피를 쏟는 동생의 주검 밑에서 숨죽여야 했다.

이라크 주둔 미군이 지난해 말 이라크 북서부 하디타 마을에서 저지른 만행은 차라리 광기에 가깝다. 동료의 폭사에 분노한 군인들이 민간인을 고의적으로 보복 살해한 정황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무고한 민간인의 24명의 생명을 앗아간 미군의 태도는 가증스럽고 오만하기 그지없다. 미군은 교전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라며 진상을 숨겼고, 희생자 가족들한테 돈을 주고 무마하려 했다. 언론 보도로 참상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미군 발표대로 묻혔을 일이다. 의회까지 은폐 여부를 추궁하겠다는데 여전히 진실을 고백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오폭과 학살로 숨진 이라크 민간인은 4만~10만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미군은 민간인 희생자는 ‘부수적 피해’라며 따로 집계조차 하지 않는다. 어쩌다 범죄 행위가 드러나도 처벌은 없다. 이탈리아 정보 요원을 사살한 군인, 팔루자에서 부상자한테 총을 겨눈 해병은 법정에 서지 않았다. 아부그라이브 포로 학대 사건 가담자들은 단순 폭행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번에도 미군은 민간인 보복 살해라는 반인륜적 만행을 일부 군인들의 일탈 행위쯤으로 여기면서 정신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은 게 전부다.

‘하디타 학살사건’은 베트남 전쟁 때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해 철군의 계기가 됐던 ‘미라이 학살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 정가에서조차 이번 사건으로 미국의 도덕성과 지도력이 총체적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부시 행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얼마 전에도 부시 대통령은 토니 불레어 영국 총리와 함께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강변했다. 외국군의 철수 일정표를 마련하겠다는 이라크 주권정부의 계획도 “당분간 철군은 없다”며 일축했다.

이라크 전쟁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산’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 야욕이 부른 ‘더러운 전쟁’으로 판명난 지 오래다. 명분없는 전쟁에 가담한 파병국들도 잇달아 철군을 서두르고 있다. 수천명의 젊은이를 파병한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기어코 살육의 방조자로 남을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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