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11 18:07
수정 : 2005.01.11 18:07
지난 10일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의 유임 소식이 전해지자 함께 있던 한 선배기자는 “노무현 정권의 인재풀이 바닥난 것 같다”고 떨떠름하게 한마디를 내던졌다. 부실 인선의 책임을 물어 핵심 수석 두 사람을 퇴진시키면서 이례적으로 그 책임자인 비서실장을 유임시킨 것은 대안 부재말고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단순히 그런 차원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올해 초 파격적인 홍석현 주미대사 내정에 이은 이기준 교육부총리의 기용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고, 그런 맥락에선 김 실장의 유임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김 실장이 이 부총리와의 막역한 관계 때문에 인사 과정에서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는 말로 책임 없음을 강조하지만, 말이 안 되는 억지 논리임은 청와대가 더 잘 알 것이다. 대통령에게 인사안을 최종적으로 보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사추천회의 의장인 비서실장이다. 특히 대학총장 출신인 김 실장이 교육부총리를 임명하는 데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차라리 직무유기에 가깝다. 더구나 이 전 부총리 아들의 연세대 특례입학 당시 학과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오랫동안 각별한 관계로 지내면서 이 부총리의 허물에 대해 누구보다 시시콜콜 잘 알고 있었을 김 실장 아닌가.
청와대 쪽의 설명은 아무래도 김 실장을 구하려는 궤변에 가깝다. 궁금한 것은 김 실장을 구하려는 노 대통령의 속내다. 과연 그렇게 애지중지해서 무엇에 쓰려는 것인가.
요즘 들어 김 실장의 행보가 일부 공개되면서 노 대통령이 그를 중용한 뜻이 조금씩 읽혀진다. 취임 초 “언론과 청와대가 한가족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하는 관계를 형성하기 바란다”고 했던 김 실장은 지난해 11월 하순 조·중·동 등 주요 언론 사주들을 잇달아 만난 것으로 보도됐다. 연말에 전경련 회장 등 경제 5단체장을 만난 데 이어 새해에도 재계·언론계·종교계의 ‘중도적 인사들’과 꾸준히 접촉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계 한쪽에서는 최근 조·중·동의 청와대를 겨냥한 공격적 보도가 부쩍 줄어든 이유를 김 실장의 행보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이기준 교육부총리 관련 의혹에 대해 이들이 상대적으로 비판 수위를 낮춘 것도 이런 해석을 낳았다. 노 대통령 역시 지난 세밑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의 송년만찬 자리에서 “언론과 건강한 협력관계,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며 “분위기를 바꾸려고 앞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해 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조선일보 사주가 지난 3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언론과 정부는 비정상적 관계다. 지나치게 비판 일변도인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쓰라고 편집국에도 얘기했다”고 화답한 것을 보면 확실히 정권과 조·중·동 사이에 뭔가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권력과 언론이 불필요한 싸움을 자제하고 정상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국민을 위해서도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이른바 ‘캐시 앤드 위스키’ 정책에서 사주 구속까지 오락가락하다 결국 이렇다할 언론개혁의 성과물조차 내지 못한 김대중 정권의 경험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불안한 공조’가 적잖이 걱정될 것이다.
특히 그 방향이 개혁 추진을 보류하는 대가로 조·중·동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라면 더더욱 우려스럽다. 지난해 여권 스스로 개혁입법이라며 명운을 걸다시피 한 4대 법안이 지지부진한 결과를 낸 뒤끝이어서 더욱 그렇다.
김 실장 유임 이후 진행되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조·중·동은 대통령의 유임 결정을 ‘실용주의’ 또는 ‘뉴 노무현’이라며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시민단체는 김 실장의 퇴진을 요구했고, 민주노동당은 그를 “개혁 후퇴의 몸통”이라고 불렀다. 그의 유임이 차라리 ‘대안 부재’ 때문이라면 모르되 ‘개혁 후퇴’의 징표라면 정말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정권 시절, 김 실장과 같은 대학총장 출신의 청와대 비서실장이 있었다. 이후 교육부총리까지 역임한 뒤 지금은 색깔론을 앞세워 전교조 타도의 선봉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이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공언하며 취임한 김 실장의 모습과 자꾸 겹치는 것은 필자만의 기우이길 기대해본다.
김이택/사회부장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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