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이 아니었으면 노무현 대통령은 없었다. 민주당 시절 이인제 후보에게 줄곧 뒤지던 노무현 후보는 광주 경선에서 판세를 뒤엎었다. 2002년 12월 대선에서 광주·전북·전남은 투표자 298만명 가운데 92.3%인 275만명이 노 대통령을 지지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호남과 노 대통령의 정치적 결합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은 편중인사 시비로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청와대 쪽은 부인하지만, 편중인사 시비는 실체가 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 김대중 대통령이 임명한 비서관들을 대부분 바꿨다. 잘려 나간 사람들의 상당수가 호남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와 주요 기관 핵심요직, 그리고 알짜배기 산하단체장 등 노른자위 자리는 영남 사람들, 특히 부산·경남 인맥이 차지하고 있다. 호남 출신들은 주로 무색무취한 사람들을 구색 맞추기로 쓰고 있다는 느낌이다.
청와대 정책실에는 김병준 실장과 3명의 수석비서관, 9명의 비서관이 있다. 이 13명 가운데, 호남 출신이 2명, 영남 출신은 9명이라는 자료도 있다. 호남 사람들은 요즘 “누가 만들어준 정권인데…”라며 소외감과 배신감을 거침없이 토로한다.
노 대통령은 올 5·18 때 광주를 방문해 “광주 문화중심도시 건설 사업, 서남권 관광복합레저도시 건설, 광산업 등에 정부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음에도 호남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호남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호남이 왜 몰라주느냐는 서운함이 배어 있다. 광주 문화중심도시에는 10년 동안 2조원이 투입된다. 광산업 2단계에도 4천억원이 들어간다. 노 대통령은 부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양항을 예정대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서남해안 관광지 개발사업인 ‘에스 프로젝트’도 전폭 지원을 약속했다. 심지어 이해찬 총리가 “경제성이 없다”고 반대의 뜻을 밝혔던 호남고속철은 노 대통령이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단순히 경제성만 강조하는 타당성 조사 방법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개선 방안을 지시해 놓은 상태다. 경제성이 없어도 호남 민심을 고려해 착공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호남 민심이 사나워진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호남은 아직도 ‘아날로그’ 문화에 더 익숙하다. 노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디지털’ 문화와 ‘코드’가 맞을 수 없다. ‘디지털’은 숫자로 말하고, 로드맵을 만든다. 속도를 중시한다. ‘아날로그’는 그런 것보다도 진심과 감동, 인간적 체취를 중시한다. 인사 문제는 그래서 중요하다. 노 대통령의 잘못은 아날로그에 디지털 코드를 꽂으려 하는 데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좀더 솔직하고 감성적인 태도로 호남에 다가설 필요가 있다.
호남도 감정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노무현은 호남만의 대통령이 아니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안도 웬만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 생산적 복지, 정보통신 등 김대중 정부의 핵심 개념을 이름만 바꿔서 승계했다. 노무현 정부의 성공은 크게 보면 김대중 정부의 성공이고, 호남의 성공이다. 호남과 노 대통령의 결별은 조기 레임덕과 국정 마비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호남은 노 대통령에게 “무조건 내놓으라”고 요구해선 안 된다. 호남 스스로 발전 전략을 세워서 무엇이 필요한지 노 대통령에게 정확히 요구해야 한다. 친미나 반미가 아니라, 용미(미국을 이용함)를 해야 하듯이, 호남에서는 친노나 반노가 아니라, 용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 한 말로,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었다”는 뜻이다.
성한용 정치부 기자 shy99@hani.co.kr
성한용 정치부 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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