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25 18:22
수정 : 2005.01.25 18:22
어느 분야에서나 ‘박힌 돌’과 ‘굴러온 돌’의 관계는 껄끄럽다. 스포츠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대한축구협회 회장 선거를 앞두고 불거졌던 양쪽 사이 갈등이 대표적인 보기다. 4선에 성공해 16년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한 정몽준 회장은 축구선수 출신이 아니다. 한마디로 ‘굴러온 돌’이다. 정 회장의 장기집권에 반발했던 축구연구소와 한국축구지도자협의회의 주축 멤버는 축구선수 출신들, 곧 ‘박힌 돌’들이다.
박힌 돌 처지에서 볼 때, 굴러온 돌의 주인 행세가 고깝기만 하다. 어려울 때 도와달라고 잠시 불러들였더니 아예 안방을 차지한 채 떠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제는 살림 규모도 커지고 수지타산도 맞출 수 있는 자신감도 생겼다. 굴러온 돌 처지에서는 박힌 돌의 반란이 배은망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려울 때 들어와 살림을 피워놓고 폼도 잡을 수 있게 해줬더니 공덕비를 세워주기는커녕 소박맞히려고 ‘난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박힌 돌인 스포츠 경기단체가 외부 인사인 굴러온 돌과 ‘정략 결혼’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재정문제 해결이다. 살림 형편이 어려운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 단체들은 돈 많은 재계 인사를 회장으로 모셔오는 게 큰 일이다. 그러지 않으면 비인기 경기단체의 대부분은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드는 현실이다. 둘은 대외적인 영향력의 확보다. 한 경기 단체가 경기인 자체만의 힘으로 국제대회를 유치하고 스폰서를 끌어들이기는 버겁다. 정부를 상대로 재정이나 제도 개선을 이끌어내는 것도 그렇다. 이런 일에는 대내외적인 영향력이 크고 사회 곳곳에 강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정치인이 제격이다. 곧 새로 출범할 한국배구연맹(KOVO)이 ‘거물’인 김혁규 열린우리당 의원을 초대 총재로 영입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돈과 대외적 영향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 과정에서 굴러온 돌도 반사이익을 본다. 쉽게 말하면 ‘내가 어느 경기단체 회장이오’ 하는 명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략 결혼은 불안한 동거가 되기 쉽다. 어느 쪽이건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대한축구협회의 사례는 여러 사례 중의 하나다.
이런 점에서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모범적인 단체다. 정치인 출신의 김원길 총재와 경기인 출신 조승연 전무가 굴러온 돌과 박힌 돌의 한계를 이해하면서 단체를 잘 이끌고 있다. 1999년 말 부임한 김 총재는 “외부의 돈과 협력을 끌어들여 여자프로농구의 기반을 닦으라는 나의 임무는 이제 거의 다 끝났다”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음 총재는 여자농구계의 ‘가미사마’(일본어로 ‘신’을 높여 부르는 말)인 조 전무”라고 공언하고 있다. 조 전무도 “김 총재가 조금만 더 자립기반을 닦아주면 된다”며 인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실제, 농구는 다른 종목보다 박힌 돌의 수준이 높다. ‘겨울 스포츠 부동의 꽃’으로 자리잡은 남자 프로농구만 봐도, 이를 애초부터 기획하고 반석 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외부인이 아니다. 농구선수 출신의 김영기 초대 총재다. 다른 프로스포츠 분야에서는 아직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스포츠 분야도 그 분야에서 커온 박힌 돌이 수장을 맞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스포츠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직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장 큰 원인은 박힌 돌의 능력 부족이다. 한 농구인은 “우리가 그나마 다른 종목보다 나은 것은 학창시절에 다른 종목 선수들이 공부를 외면하고 운동만 할 때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포츠계가 굴러온 돌의 식민지배 체제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말이다.
스포츠인이 진정으로 ‘스포츠인에 의한, 스포츠인을 위한, 스포츠인의 경기단체’이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먼저 스포츠인 스스로 일그러져 있는 학원스포츠의 모습을 제대로 가다듬는 데 앞장서야 한다. 공부를 외면한 지금의 학원 스포츠 풍토에서 박힌 돌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꼴이다. 올해는 마침 유엔이 정한 스포츠·체육의 해다.
오태규 스포츠부장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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