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맺어진 한-일 협정은 치욕적인 ‘구걸외교’의 산물이라는 것이 외교문서 공개로 확인됐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존심도 권리도, 일말의 정의도 다 내팽개치고 일본으로부터 터무니없이 적은 돈 몇 푼을 받아내는 데 급급했다.
한-일 회담은 51년에 시작됐으나 일제 강압통치로 큰 피해를 본 한국과 일본의 인식차로 전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난산을 거듭했다. 그러던 것이 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이듬해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도쿄에서 일본 외상을 만나 ‘김-오히라 메모’에 합의하면서 급진전된다.
쫓기듯이 한 구걸외교의 결과는 참담하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문제부터, 군위안부·사할린동포 문제, 대한민국 정부의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 조항 논란,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법적 지위, 독도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질곡을 남겼다. 한-일 병탄이 원천무효임을 명시하지 못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과거 식민통치를 합법화할 수 있는 빌미를 줬다는 점도 뼈아프다.
군사정권은 당시 독도문제를 ‘제3국의 중재에 맡기자’고 일본 쪽에 제안하고, 협정 체결 이듬해에는 징병·징용됐다가 숨진 무연고 한국인 유골을 일본땅에 영구매장을 하도록 요청했다고 하니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 협정의 주역 김종필씨는 이제는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사죄해야 한다. 일본에 머물던 그는 외교문서가 공개되자 일정을 늦춰 귀국했으나 자신은 길만 열었을 뿐이며 얘기할 게 없다고 피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군사정권의 필요 때문인지, 한-미-일 안보체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종용 탓인지, 당시 반대데모를 위수령과 계엄령으로 차단하면서까지 협정을 강행한 내막을 밝혀야 한다. 오늘도 계속되는 피해자들의 한맺힌 절규를 눈앞에 보고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메모에 이어 두번 죄를 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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