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이 극심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994년 흑인해방조직인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집권했다. 인종 화해를 어떻게 이뤄내느냐가 최대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수백년 동안 누적된 의식과 관행은 완고했다.
다음해 5월 ‘백인의 수도’로 불렸던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아공과 뉴질랜드의 럭비월드컵 결승전이 열렸다. 7만 관중도 대부분 백인이었다. 연장전 끝에 15 대 12로 이긴 경기 결과보다 더 극적인 일은 따로 있었다.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가 선수복을 입고 경기장에 나타난 것이다. 어리둥절해하던 관중들은 “넬슨! 넬슨!”이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이런 분위기는 경기 뒤 흑인·백인이 함께 거리로 뛰어나와 축하 행사를 펼치는 것으로 이어졌다. ‘공유지식’을 창출하는 사건을 통해, 인종차별의 상징이었던 럭비가 모두에게 자부심의 구심점이 된 것이다.(<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공유지식은 모든 관련자가 함께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한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어야 하며 그 외 사람들도 그럴 것으로 확신해야 한다. 이런 지식을 가진 집단이 충분히 크고 연대의식이 강하다면 거대한 사회세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지식을 만들어내는 일 자체가 정치적 과정이기도 하다. “권력이라는 근본적인 현상은 타인의 의지를 도구화하는 게 아니라, 합의에 이르고자 하는 의사소통 속에서 공통의 의지를 형성하는 것이다”라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말은 바로 그런 뜻이다. 바꿔 말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재확인해주는 이야기·기호·상징 등이 없다면 통치는 불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 급락은 그가 국정 핵심 사안에서 공유지식을 만드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최대 이슈인 복지확대-증세 문제도 공유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내용과 성패가 결정될 것이다. 그 와중에 박 대통령은 ‘증세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며 거꾸로 가려 하니 딱한 노릇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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