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23일 구속 53일 만에 처음으로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직 대통령이 수갑 찬 채 호송차에서 내려 초췌한 얼굴로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장면은 보는 이들을 착잡하게 한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발뺌하는 태도에서 동정의 여지는 찾기 어렵다. 온 국민을 충격과 혼란에 몰아넣은 데 대해 반성과 사죄를 해도 모자랄 텐데 여전히 주변에 책임을 떠넘기는 데 급급한 모습은 실망스럽다. 아무리 자기방어가 급한 피고인 처지라 해도 지도자로서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려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공판에서 박 전 대통령 쪽은 “공소사실은 추론과 상상에 기인해서 기소됐다”며 18개 혐의사실 모두를 부인했다. 이미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등 관련자들의 구체적 증언까지 나와 있는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도 “어떤 지시를 한 적이 없다”며 ‘살인범을 낳은 어머니에게 살인죄 책임을 묻는 것’이란 비유까지 동원했다. “지시는 했으나 정당한 일이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 등 부하들의 혐의는 가벼워질 수 있을 텐데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변호인이 최근의 ‘돈봉투 만찬 사건’까지 검찰을 공격하는 소재로 끌어들인 것은 황당한 장면이다. 국민들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하거나 극렬 추종자들의 자제를 당부하는 등 최소한의 성찰적 면모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동안의 태도에서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 쪽은 부인하겠지만 사실 검찰이 기소한 혐의는 국민적 의혹의 ‘빙산의 일각’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최순실 두 사람의 ‘경제공동체’ 실체, 최씨 일가의 재산 의혹은 특검에서 제대로 손대지도 못했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앞세운 검찰농단, 우익세력을 동원해 정치공작을 벌인 ‘화이트 리스트’ 의혹 등도 그대로 묻혀 있다.
박 전 대통령이 법정에서 보인 태도는 정치권 친박 세력이 재기를 도모하고 아스팔트 극렬 추종자들이 ‘재판 무효’를 주장하는 상황과도 일맥상통한다. 공소사실에 대한 단죄는 물론 남은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 필요성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불거진 ‘돈봉투 만찬’ 감찰을 계기로 우 전 수석의 검찰농단을 비롯한 ‘박근혜 청와대’의 비리와 의혹들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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