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판결의 후유증이 적잖다.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석방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솜방망이 처벌 논란 속에 31일 판결문 전문이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그런데 납득하기 힘든 새로운 대목들이 많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블랙리스트의 공범이 아니’라며 내세운 이유는 국민들의 법감정과 상당한 괴리가 있다. 박 전 대통령 재판이 한창 진행중이란 점에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는 판결문에서 박 전 대통령이 노태강 전 문체부 체육국장을 강제 퇴직시킨 직권남용의 공범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는 부인했다. 대통령이 청와대나 문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받았을 개연성이 매우 크고, 문예지나 건전영화 지원 문제 등에 대해 직접 지시한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보고받았는지 알 수 없고, 특정 개인·단체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라는 지시라고 볼 수도 없다”며 공범이란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나아가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를 표방한 것 자체가 “헌법이나 법령에 위반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보수정권의 국정기조에 따라 정책을 지시한 것’이니 문제가 안 된다는 취지도 밝혔다.
어처구니없는 논리다. 엄연히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문화창작의 자유를 탄압하고 성향에 따라 차별한 것은 정책이 아니라 ‘국가 폭력’일 뿐이다. 이를 두고 ‘국정 기조’ 또는 ‘정책’ 운운하다니 재판부의 안이한 민주주의 의식과 한심한 헌법 관념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좌파 예술인과 단체에 대한 지원이 급증했다며 본질적으로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전형적인 진실 왜곡, 곡학아세의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정책을 내세운 민주정권들이 블랙리스트나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 탄압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1심 선고 뒤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의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 무죄와, 징역 7년 구형에 3년형이 내려진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솜방망이 판결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 재판부의 몰헌법적인 논리 전개와 국민과 동떨어진 판결 내용은 상급심에서 바로잡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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