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항소심에서 풀려났다.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등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 부회장에게 핵심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정경유착의 전형’으로 본 1심과 달리, 대통령이 삼성 경영진을 ‘겁박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대가를 바라고 돈을 건넨 게 아니라며, 경영권 승계를 청탁했다는 1심 판단을 대부분 뒤집었다. ‘안종범 업무수첩’과 ‘김영한 업무일지’의 증거능력도 일체 부인했다.
이미 언론을 통해 일지 내용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국민들의 법감정과는 동떨어진 판결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증거법 원칙’이 왜 유독 삼성 사주들에게만 대를 이어 적용되는지, 36억원 횡령·뇌물공여 혐의를 인정하면서 집행유예로 풀어준 것이 과연 적정한 형량인지도 의문이다. 아마도 국민들에게는 희대의 ‘유전무죄’ 판결로 기억될 것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최고 정치권력자가 삼성그룹 경영진을 겁박하고 박 전 대통령 측근인 최순실씨가 그릇된 모성애로 사익을 추구한 것”이라며 “피고인은 두 사람의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해 수동적으로 뇌물공여로 나아간 것”이라고 판시했다. 이 부회장 쪽이 애초부터 주장해온 취지를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 연장선에서 “삼성의 승계작업이라는 현안이 존재했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이를 위한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는 게 판결 요지다.
그러나 아무 현안이 없는데 대통령이 ‘겁박’한다고 수십억원을 그냥 퍼줬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약하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 개별 현안이 이 부회장의 지배력 확보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효과가 있음은 인정하면서도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점도 이해하기 힘들다. 청와대 민정·정책기획 수석실과 공정거래위, 국민연금공단 등 정부기관이 총동원돼 합병 성사에 나서고 이 부회장이 이를 위해 직접 공단 간부까지 만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건희 회장 때의 에버랜드와 삼성에스디에스(SDS) 사건 이래 삼성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여러 편법을 동원했고 이번 합병도 그 일환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이를 부인한 것은 일반 상식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판단이다.
국민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에 막대한 피해를 안겼는데도 “국민혈세가 동원된 공적자금 투입 등 전형적 정경유착 모습은 보기 어렵다”고 한 표현은 눈을 의심케 한다. “승마 지원에 사용한 돈은 사회공헌 활동 비용의 일환”이라고 한 대목도 마찬가지다. 중죄인 36억원 횡령을 인정하면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사실과 겹쳐 보면, 봐주기 위해 작정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사법부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도 상고심에서 엄격한 판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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